▲경북 영주에 있는 임진왜란 공신 오극성 고택이다. 그이 동생 오윤성은 명량 대첩 때 공을 세웠다.
정만진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단 열세 척 배로 일본군 330척을 격파해 대승리를 이룬 전투다. 전투 지점은 뭍에서 진도로 건너가는 울돌목 바다, 즉 명량이다. 장소가 전라남도 남해인데 대구·경북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
당시 아군은 전함이 13척뿐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했다. 그때 영양 출신의 오윤성이 이순신 장군의 참모로 있었는데, 기가 막히는 계책을 충무공에게 진언한다. 어민들의 고기잡이 배 수십 척을 판옥선 뒤쪽에 죽 나열을 시키자는 것이다.
일본군이 보기엔 우리 군선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공격을 망설이게 되면서 전투 개시 시각이 늦춰졌다. 이윽고 밀물썰물 교대 시간이 되고, 울돌목의 물살은 제대로 거세졌다. 이때를 기다렸던 충무공은 전투를 본격화하고, 마침내 대승리를 거뒀다.
명량대첩 승리 전략이 영양 출신의 오윤성 참모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청소년들에게 많이 알리면 애향심 고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고장에도 대단한 분이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스스로 자긍심을 키우게 된다. 영양읍에 있는 문화재자료 498호 '오극성 고택'을 찾아보자. 오극성 역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공신으로 오윤성의 형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오랫동안 계획한 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과 대구·경북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곳은 하얼빈이지만 당일 갑자기 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안 의사는 그 이전부터 이토 저격을 도모해 왔다.
이토가 순종을 이끌고 1909년 1월 8일과 12일 대구를 방문하고, 그밖에 청도·부산·평양 등지도 순회한다는 계획을 알게 된 안 의사는 그 기간 내에 이토 저격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미처 총을 준비하지 못한 데다, 이토 바로 옆에 있는 순종이 다칠까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안 의사가 대구에서 이토를 처단했더라면 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로 다시 한 번 각광을 받게 되었을 텐데, 하고 역사의 가설을 떠올리면서 일견 아쉬움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