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전후 부산 자성대 부근 마을조선인 노하마을은 초가집이었고 자성대에 있는 부산진지성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출처 : 「Coree」,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France.)
이병길
바닷가에는 소금(소곰)을 굽던 마을인 소고 마을이 있었다. 당시에는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금물을 끓여서 만들었던 자염(煮鹽)이었다. 서해안에 많이 있는 천일염은 해수를 끌어들인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점차 증발시켜서 결정시킨 소금이다. 천일염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태양염 또는 청염(淸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매우 필요했다.
고기나 소금은 부를 가져오는 산 아래에 있어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 불렀다. 바다에서 보니 부산(富山)의 꼭대기가 마치 소금을 굽는 솥뚜껑같이 보여 부산(釜山)이라 불렀을 수 있다. 또는 산의 생김새가 거꾸로 뒤집은 솥같기 때문에 또는 임란 때 일본성을 지으면서 마치 떡시루같이 위가 평평하여 증산(甑山)으로 불렀을 수 있다. 당시의 부산은 부산진성이 있었던 지금의 증대산이라 추측된다. 임란 이후 자성대로 부산진성을 옮기면서 자성대를 부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박재혁의 집은 좌자천에 가까웠고 지리적으로는 노하마을과 사도천마을 위쪽이었다. 박재혁의 집이 있었던 범일동이지만 실상 좌천동 지역이었다. 즉 그의 집에서 지금의 데레사여고와 범내골 방향의 밤일동은 집이 드물었다. 그리고 노하마을과 자성대의 북쪽 지역은 논이었다. 결국 박재혁 집부터 부산천까지의 지역이 조선인 밀집지역이었다.
박재혁 집은 좌자천의 '좌(佐)'와 부산진의 '진(鎭)'이 합쳐서 좌진이 되었던 좌진내마을, 즉 자진내마을과 가까웠다. 박재혁 친구들은 자진내마을 아이들이었다. 지금 정공단 주변 마을이다. 마을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부산진성 부근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부산진성 안쪽에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임란 때 증대에 왜성을 쌓은 후 퇴각한 후 부산진성은 지금의 자성대로 옮겨가고 옛 부산진성 남문 바닷가 일대는 마을이 형성된 듯하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4년(고종 41) 동래군 동평면 좌천동이다.
왜관이 있었던 범일·좌천동 마을
조선 시대에는 자성대 앞 바닷가를 부산포, 좌천동 앞 바닷가를 개운포로, 수정동 앞 바닷가를 두모포로 불렸다. 부산포 왜관(1407년, 태종 7, 현 부산진시장 주변), 두모진 왜관(1607, 선조 40, 현 수정초 부근, 고관)이 있었다. 두문포 왜관이 1678년(숙종 4)에 초량왜관(현 용두산 부근)으로 옮겼다.
부산진지역은 부산포 왜관과 두문포 왜관이 옮겨지면서 조선인 마을이 그 지역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부산진 사람은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해 적대적이기보다 우호적인 경향이었다. 친일의 마을이었다. 생계 문제는 나라, 민족, 정치를 뛰어넘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