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족소식지가 2주년이 되었습니다. 매달 한 번씩 가족 소식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각지의 가족들이 소식을 전해주면, A4 4면으로 신문을 인쇄하여 가족들에게 보냅니다. 코로나19의 2020년에,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 모릅니다.
이창희
2014년의 한참 뜨거웠던 여름, 아빠가 돌아가셨다. 덩그러니 남은 가족들은 '더 자주 보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자' 다짐했지만, 전국 곳곳에 흩어진 우리들은 그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70년대의 산업화 시대에 태어난 우리 집안 4남매는, 시골의 여느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학교를 졸업하며 모두 고향을 떠났고, 마흔을 모두 넘긴 지금은 각자의 일터에 둥지를 틀었다. 엄마는 고향인 충남 서산에, 나는 포항, 둘째는 울진, 셋째는 대전, 막내는 인천에 있으니, 이 정도면 전국구 가족이다.
"엄마. 포항으로 올래?"
"거기서 내가 뭘 한다니?"
아빠가 떠나신 후 고향의 작은 집을 혼자 지키는 엄마가 걱정되어, 이런저런 제안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오시면 완벽한 타인이 되실 텐데, 엄마에겐 차라리 고향마을의 익숙한 터전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주 연락하기로 하고, 가족 간의 거리를 인정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가족신문을 만들자!"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2018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 생신을 맞아 전국에서 모인 가족들에게 제안했다. 가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기자가 될 수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펴내는 것으로 말이다.
내가 편집장을 맡아서 하겠다고 했더니, 금세 둘째 동생이 손을 들고 도와주겠다고 한다. 신문의 판형이나 서체, 글자의 크기 등에 대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가족 신문은 벌써 23호를 발행했고 2주년 기념호를 준비하는 중이다.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은 매월 3주 차 주말까지 기사를 준비하여 내게 보낸다. 자식들은 마감일에 간신히 맞춰서 이메일로 기사를 보내지만,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는 달력 뒷장에 꾹꾹 눌러쓴 기사를 우체국에서 보내신다.
가끔 내가 집에 들렀을 때 전해주시기도 하지만, 코로나19의 세상에서는 우편으로 보내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달에는 엄마의 밭에서 수확한 귀여운 호박 두 개와 함께 기사가 오기도 했다.
순조롭게 신문 발행이 진행되던 올해 2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맞이했다. 2월 중순, 대구·경북 지역의 코로나19가 심각한 상황을 맞이했다. 평소처럼 2월 22일까지 기사를 모아서 주말 동안 동생이랑 편집을 마치면, 출력하여 각지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것은 나의 역할인데, 그만 2월 22일부터 집에 갇혀버렸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회사에서는 갑작스럽게 재택근무를 지시했고, 나는 꼼짝없이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동생에게 부랴부랴 도움을 요청했다.
"신문을 출력해서 보낼 수가 없어. 도와주라."
"인터넷으로 출력을 의뢰해 볼게. 걱정하지 마. 건강 조심하고!"
다행스럽게 재택근무는 2월 28일로 종료되었고, 그 달의 가족신문도 무사히 가족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곧 정리될 것이라고, 따뜻한 봄이 되면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대지만, 어느덧 코로나19가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시간이 1년을 꼬박 채우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각자의 삶터를 벗어나지 못하니 흩어진 가족들이 물리적으로 만나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올해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각자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쓴 가족신문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족신문의 주제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부모님의 네 남매가 열네 명의 가족들로 늘어났으니, 그 안에서의 이야기들은 세대도 공간도 각자의 분야도 꽤나 달라졌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적인 다양성은 기본이고 우리들의 직업도, 관심사도 조금씩 다르다 보니, 가족신문의 면면을 채우는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고향의 엄마가 밭에서 키우는 작물들에 대한 걱정과 날씨에 대한 기원을 보내시면, 우리 집안 유일한 며느리는 인천의 가족들의 잔잔한 일상을 공유해 준다.
신문 하나가 주는 크나큰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