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시민들이 거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당국의 철거명령에 대해 항의하며 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다른 나라는 몰라도, 독일에서 세워지는 것과 관련해서는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독일 역시 위안부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틀러 정권 역시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어 전쟁 수행에 악용하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2007년 2월 6일 치 <오마이뉴스> 기사 "
독일, 나치 위안부 운영 스스로 진상공개(http://bit.ly/V5Die)"에 개략적으로 설명된 것처럼,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뿐 아니라 독일군에도 있었다. 나치는 독일 군인뿐 아니라 수용소 노동자들과 관련해서도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일부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을 극대화시킬 의도에서였다.
2007년 1월 30일 치 중국 CCTV 인터넷판 보도를 요약·정리한 위 <오마이뉴스> 기사에 아래와 같은 대목들이 있다. 아래에 나오는 '죄수 기방'이란 번역어는 '수용소 위안소'나 '수용소 매춘소'로 바꿀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나치 친위대는 집단수용소 10곳에 죄수 기방(중국측 표현은 囚犯妓院)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수용소 내 남자 노동자들(특히 고급 기술자)의 성적 욕구를 해소함으로써 노동생산성을 제고한다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은 수용소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국방군·외국노동자·친위대를 위한 별도의 '기방'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경우에는 남자들의 성 욕구를 배출시킴으로써 남자들 간의 동성애 등을 막기 위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군국주의의 경우에는 자국뿐 아니라 조선·중국 같은 점령지에서 위안부를 대거 동원했다. 나치독일의 경우에는 주로 자국민들 중에서 그렇게 했다. 독일에서는 수용소에 갇힌 독일인들이 위안부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2018년에 <여성과 역사> 제29권에 실린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의 논문 '나치 국가의 매춘소와 강제 성매매'는 라벤스부르크 수용소 및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출신 위안부들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약 21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 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174명이다. 독일인이 114명으로 절반이 넘고 폴란드인이 46명, 그 외에 러시아인(6명), 동유럽인, 네덜란드인이 소수 있었다. 유대인 여성은 없었으니, 유대인 남성은 매춘소에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나치에 대항한 정치범도 있었고, 유대인 여성과 동성애를 한 독일 여성도 있었다. 동성애자인 줄 알면서도 남성 노동자를 위한 위안부로 동원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가 강제동원됐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 한다. 나치독일도 위안부들을 '자발적'으로 참여시켰다는 모양새를 갖추고 싶어 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친위대는 매춘소 여성을 조달하는 데 가능한 한 '자발'의 모양새를 갖추려 애썼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자수용소 수감자 중에서 '자원자'를 모집했다. 이때에 6개월만 일하면 석방시켜준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매춘소에 들어가면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는 소문이 퍼지며 자원자가 줄자, 이전에 매춘부였던 여성들을 골라냈고 '자원'은 무작위 선발과 강제 차출로 바뀌었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나치 독일도 위안부들에게 금전적 대가를 보장했다. 위안소 이용료 2마르크 중에서 0.45마르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들처럼 독일군 위안부들도 대가를 받지 못했다.
이에 관한 내용이 위 논문에 설명돼 있다. 아래의 '코곤'은 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혔던 오이겐 코곤(1903~1937)이다. 가톨릭 수도원에서 성장한 그는 정치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뒤 가톨릭 잡지 편집장을 지내고 반나치 활동을 하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이용료는 2제국마르크였는데, 친위대가 1.5마르크를 가져가고 5페니히는 여자 감독, 나머지 45페니히가 성매매에 동원된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마저 당장이 아니라 석방된 다음 지급한다는 약속이었지만,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고, 이 돈은 모두 나치 금고로 들어갔다. 코곤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친위대가 수감자들의 매춘소 이용을 독려하고 강제하였다고 기록했는데, 아마도 이 사업이 친위대의 돈벌이 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치 독일이 여성을 노예화하는 죄악을 저지른 데는 지도자인 히틀러의 관념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는 '독일 여성은 건강한 독일 남성을 출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품으로 비하하는 이런 인식이 독일군 위안소의 등장에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2007년에 <독일연구> 제14호에 실린 권형진 건국대 교수의 논문 '나치즘과 젠더'는 히틀러의 여성관을 이렇게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한 민족의 생에는 두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여성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의 세계다. ··· 여성의 세계는 그녀가 행복하다면, 바로 가족과 그녀의 남편, 그녀의 아이들과 가정이다.' 가정주부·아내·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히틀러의 여성관은 나치 집권 후에 공식화된 젠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여성이 행복한 경우는 가족·남편·아이·가정과 함께할 때라고 했다. 여성 스스로에 의해 여성이 행복해질 경우는 아예 배제한 것이다.
히틀러뿐 아니라 수많은 남성들이 그 전에나 그때나 그 후에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개조하고 싶어 하는 지도자가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고 사회를 그 방향으로 이끌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히틀러의 생각은 더욱 더 위험했다. 나치 독일에서 위안부 제도가 나오기 쉬웠던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피해자들에 의한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