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황제로 칭한 고려 태조 왕건
이준수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은, 백성의 신임을 얻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워. 그런데 고려를 세우고 한반도를 통일할 때까지 무려 18년이나 더 걸려."
"아빠가 보는 드라마 봤어요. 최수종 아저씨가 왕건이라던데요."
"최수종은 아니, 왕건은 호족들의 군사력과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결국 후백제와 신라를 통일하지. 그 과정에서 호족과 결혼으로 관계를 맺느라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고 해. 자식은 아들만 25명이고!"
흥부도 울고 갈 왕성한 자손 생산 능력 앞에, 아이들은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왕건은 이름값을 한다나. 도대체 왕건이라는 용어를 평소에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능력만큼은 인정한다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교과서에 실린 왕건의 청동상 사진에 주목했다. 청동상은 고려 왕조가 건국 초기에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증거로, 왕건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이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통천관이라는 설명이 딸려 있었다.
"황제에게는 만세를 부를 수 있지만, 왕에게는 천세라고 밖에 할 수 없어."
"세종대왕한테 만세 하면 안 되나요?"
"당시에는 만세라고 못 했지. 중국에 있는 황제만 쓸 수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황제에게는 폐하라고 해도 되지만, 왕에게는 전하라고 해야 돼."
"그럼 왕건은 폐하랑, 만세를 다 쓴 거예요?"
"응 그랬을 거야. 때로는 스스로를 왕으로 낮추기도 하고 그랬어."
아이들은 중국식 예법에 약간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치사하게 한 나라의 왕이면 만세라도 부르게 해 주지, 그걸 또 차별하고 그러냐며 투덜거렸다.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의 눈에는 퍽이나 이상했나 보다.
그리고 우리가 "만세"라고 할 때의 만이, 진짜로 숫자 만인 줄 몰랐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영어로 후래이(Hooray~) 하듯이 기쁨과 즐거움의 감탄사 정도로만 여겼는데 정말로 수학적 의미를 담아 천세, 만세를 구분할 줄이야.
"선생님 그러면 백세! 이런 거도 있어요?"
"글쎄. 아직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기발한 발상이었다. 권력의 정도에 따라 마지막 자리에 붙은 0을 하나씩 지우면 되니까 조선시대 관찰사 정도 되면 "백세!" 이래도 되지 않을까? 역시 애들은 엉뚱한 면이 있다. 여기까지 하고 수업이 끝났으면 기특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마무리 지었으려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선생님 십세!"
"맞아, 선생님 정도면 십세가 적당해."
"십세! 십세!"
"웃긴데? 선생님 십세!"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나의 권위에 걸맞는 구호를 합의해 버렸고 덜컥 '십세 선생'이 되고 말았다. 십세 선생은 발음이 중요해서, 자꾸 듣고 있으면 욕 같아서 기분이 나빠진다. 십세! 십세! 설마 아기 왕건 같은 눈망울로 선생님께 포악무도한 짓을 할 리가 있으려냐만, 자꾸 귀가 간지럽다.
몇몇 목소리는 분명 십세의 십을 된소리로, 명백한 웃음기를 실어 발음하고 있으나 도저히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잡아내지 못한다. 음, 차라리 영점 일세가 더 나았으려나. 애매한 권력은 놀려먹기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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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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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겐 만세, 왕은 천세"... 그럼 선생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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