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동상책을 읽고 있는 다산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평생에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박태상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정약용이 그때 쫓겨나지 않고 조정에 남아서, 이와 같은 경세의 철학을 '유표'가 아닌 국정개혁의 '방안'으로 제시하였다면 국치로 가는 비극을 면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정약용은 뒷날 「자찬묘지명」에서 『경세유표』가 어떤 책인가를 설명한다.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제(官制)ㆍ군현제(郡縣制)ㆍ전제(田制)ㆍ부역ㆍ공시(貢市)ㆍ창저(倉儲)ㆍ군제(軍制)ㆍ과제(科制)ㆍ해세(海稅)ㆍ상세(商稅)ㆍ마정(馬政)ㆍ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생각(新我之舊邦)'에서 저술한 책이다.
『경세유표』는 동학농민혁명의 이념적 지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의(草衣)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우(道友)로 있었다. 다산이 유배지로부터 고향에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하생인 이청(李晴)과 그리고 친한 승려 초의(草衣)에게 맡겨져 비밀리에 보관하여 전포하게끔 의뢰하였다.
그런데 그 전문(全文)은 도중에 유실되고 그 일부는 대원군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남상교ㆍ 남종삼 부자 및 홍봉주 일파에게 전해졌다.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ㆍ윤세현ㆍ김병태ㆍ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ㆍ김도일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ㆍ김개남 일파의 수중에 들어가 그들이 이용하였다. 전쟁 후 관군은 정다산의 비결이 전녹두 일파의 비적을 선동하였다고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ㆍ백련사ㆍ대둔사 등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주석 5)
일찍이 호남의 민란발생을 우려했던 정약용은 그런 낌새를 지켜보면서 『경세유표』를 지었고, 실제로 이 저서는 뒷날 전봉준ㆍ김개남 등 동학혁명 지도자들의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다.
사실 당시에 있어서 다산실학은 특히 호남 일대의 뜻있는 농촌지식인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 같다. 기정진ㆍ이기ㆍ황현 등의 호남 명사들이 다산실학의 일정한 추종자였던 것도 그 영향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
특히 반계(磻溪)와 다산의 개혁사상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토지개혁안으로서의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집필했던 이기(李沂)가 기병(起兵) 중의 전봉준을 찾아가 거사에 함께 가담할 것을 제의한 것도 다산실학의 영향권에 있을 수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농민운동을 전개하면서, 토지문제의 해결방안을 다산실학에서 구한다는 것은 매두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주석 6)
주석
4> 윤동환, 앞의 책, 373~374쪽.
5>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460~461쪽, 국립출판사, 1955.
6> 김영호, 「다산학 연구서설 - 다산실학에 대한 연구성과와 그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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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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