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이 10일 자정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조선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등극한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는 섣달그믐 밤에 민간의 외양간과 화장실까지 환히 켜놓고 불화살을 쏘아 올려 한밤중을 환하게 밝히는 이유와 관련해 "옛날 대나(大儺)를 열어 역질 귀신을 쫓던 제도의 흔적이며, 또한 섣달그믐 밤과 설날 아침에 폭죽을 터트려 귀신을 놀라게 하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섣달그믐 밤의 나례(대나) 의식이 역병을 비롯한 각종 재앙을 쫒아내는 행사였다는 설명이다.
심야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지금 이 행성에 가혹하고 장기적인 제재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한 속에서 비상 방역도 해야 하고 혹심한 자연피해도 복구해야 하는 엄청난 도전과 난관에 직면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라고 강조했다.
1950년 이래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가하는 '미국 귀신'에 더해, 금년 들어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 '역질 귀신'과의 싸움에 직면한 북한의 현실을 언급한 대목이다. 북한이 이런 위기에 잘 대응해서 '재앙을 억압하고 목표를 빛나게 달성했음'을 보여주고자 심야 열병식을 기획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판 심야 나례를 연출해 '귀신'을 막거나 쫓아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면서도, 북한 지도부는 대외관계와 관련해서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은 신형 ICBM을 과시한 열병식장에서 "우리 당은 우리 국가와 인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건드리거나 위협을 줄 수 있는 세력은 선제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제일 확실하고 튼튼한 국가 방위력으로 규정했으며 그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 보유에 모든 것을 다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단한 갱신 목표들을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다"라며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바로 뒷부분에서 조심스러움을 드러냈다.
"나는 우리의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의 전쟁 억제력을 키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자고 키우는 것뿐입니다."
ICBM 전시를 통해 미국과 일본에 군사 역량을 보여주면서도, 이들과의 관계에서 돌발 변수가 나오지 않도록 막으려는 의중을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다. 미국 대통령선거의 윤곽이 아직 뚜렷하지 않은 지금, 일종의 현상유지책을 구사하면서 상황을 관찰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북한이 현상변경을 단속하고 있다는 점은 김정은이 남북관계 악화를 막기 위한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업지도 공무원 피살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예측불허 상황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없지 않은 지금 단계에서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내며, 하루빨리 이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관계·북미관계·북일관계에서 현상변경적 요소가 돌출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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