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생활 중의 친구 양철웅(1990년대 모습. 그는 나의 장편소설 '용서'의 실제인물이다.)으로 소천 직전의 모습이라고 했다.
이용호 목사
내 고향 구미를 모르던 학급 친구들
"얘, 너 어느 중학교를 나왔니?"
"구미중학교 나왔다 아이가."
"아이가? 그 말 참 재미있다. 구미중학교가 어디 있니?"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 있다."
"경상도 아주 깊은 두메산골인가 보다."
학급 친구들은 내 고향 '구미'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경상도 깊은 두메산골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설명했다.
"아이다. 구미는 기차정거장도 있고, 경찰서도 있다. 보통 급행열차도 서는 제법 큰 고장이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서울이 아니면 모두 시골 촌놈으로 취급했다. 게다가 뒤늦게 입학하자 보결생 취급을 했다. 그날 하굣길에 짝이 가르쳐준 학창서점에서 교과서도 사고, 신신백화점 교복점에서 교복과 교표가 새겨진 책가방을 샀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교모는 사지 못했다.
이튿날 짝은 내가 새 교복에 낡은 모자를 쓰고 등교한 것을 보고는 다음 날 자기가 중학교 때 쓰던 걸 갖다주었다. 그때 내가 썼던 모자는 빛깔이 바래져서 완전히 누렇게 탈색되어 보기에도 몹시 흉했다.
주인아주머니 도움으로 어렵게 등록해 학교에 다녔지만 도시 학급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스케치북이니 백지도(실습용 지도노트)니 부기장이니 물감과 같은 수업 준비물에다가 학급비, 축구시합 관람비 등 자질구레하게 돈 드는 일이 무척 많았다.
특히 당시 중동고는 축구를 잘해서 매달 한두번 꼴로 서울운동장에 단체응원을 갔다. 그런데 나는 축구시합 단체관람비를 낼 수도, 수업 시간 교재물 준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려운 내 사정을 모르는 교과 선생님들은 수업 준비 불량이라고 막대기로 손바닥을 때리기도 하고, 교무 수첩에다 이름을 적기도 했다.
학급 반장이나 회계는 이런저런 잡부금을 내지 못한 나를 짜증스럽게 따돌렸다. 짝 철웅은 그런 나를 곁에서 보다 못해 자기 스케치북을 찢어 낱장을 주기도 했다. 때로는 다른 반 중학교 때 친구에게 백지도나 부기장을 빌려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교과 선생님은 그런 나를 용케 찾아내고는 학습 준비 불량, 양심 불량으로 이중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