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고루 들도록 창호의 모양과 크기를 달리해놓았다. 자연환경과 보존 과학의 조화가 경판을 지켜주고 있다
해인사
분량이 6000권에 달했으며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랑캐의 침략을 불심으로 막아내고자 했던 76년의 대역사는 안타깝게도 1232년, 실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세계 최강 몽골 기마병의 말발굽 아래 무력해진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대몽 항쟁을 선언한다. 다시 한번 부처님의 불법에 의지하여 몽골군을 축출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장경 복원사업에 나섰다.
초조대장경이 불타고 4년 후, 1236년(고종 23년)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崔瑀 ? ~1249)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1251년(고종 38년)까지 장장 16년간에 걸쳐 다시 대장경을 조성했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송나라 '칙판대장경'과 비교하여 내용을 보완하였으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을 만들었다. 이를 우리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부른다. 다시 만들었다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경판은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하다 조선 초기 서울 근처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이었던 송나라 '칙판대장경'이 금나라의 침입으로 소멸되었고, 두 번째로 만들어진 '초조대장경'마저 불타 버렸으니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高)의 목판 대장경'이 되었다.
숱한 위기 겪으며 800년 이어온 '불교유산의 완결판'
온 나라가 몽골군의 창칼에 짓밟히는 위기의 순간에 그 많은 불경들을 모아 정리·교정하고 가로 69.7cm 세로 24.2cm 두께 3.6cm의 목판에 글자 하나하나 새겨 81,258개의 경판을 완성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목판에 새겨진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과 맞먹는 5,200만 자로 추산되고, 경판을 쌓아 올리면 백두산보다 더 높은 3,200m나 된다. 옆으로 놓으면 60km, 무게로 따지면 280톤, 권수로는 6,778권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유산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에도 오탈자가 없고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글씨체가 완벽하다.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도 팔만대장경을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나라, 신선들이 쓴 것 같다"라고 찬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