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용사촌(1961)6.25 전쟁 후 전국 곳곳에 부상 제대 군인들을 위한 집단 거주촌이 세워졌다. 사진은 1961년에 촬영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상이용사촌이다.
국가기록원
두 교회는 원래 한 교회였는데 나중에 분리됐다. 가까운 곳에 자리한 두 교회가 실명의용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다닌 유치원이 사라진 사연도 궁금했지만 난 실명의용촌이라는 단어 혹은 지명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실명의용촌은 6.25 전쟁에서 눈을 다쳐 시력을 잃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우이동(현재 수유동)의 한 동네를 의미했다.
<조선일보>는 1955년 6월 30일자 '우이동에 실명의용촌(失明義勇村)' 기사를 통해 "6·25 전쟁에서 시력을 잃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18동의 건물을 육군 공병단이 짓는다"며 실명의용촌의 시작을 알린다. <경향신문>은 1955년 7월 26일자에 실린 '이십칠일에 입주식 우이동의 실명의용촌' 기사에서 '실명의용촌이 완성돼 21세대 81명의 입주식이 열렸다'고 전한다.
당시 실명의용촌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다음은 <조선일보> 1955년 7월 28일자에 실린 '손에 손을 잡고'라는 기사의 일부다.
잔솔 자욱하게 우거진 속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의 새로운 주인들은 아내가 이고는데 따라 새로 들게 된 따스한 보금자리의 문가에 서서 눈을 섬벅거리며 아내와 귓속말을 소근대는 정다운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으며 이 또한 새로 꾸민 양계장에서 모이를 쫓던 닭이 헤설피 우는 소리에 고개를 들며 "우리 닭을 더 많이 기르고 싶다" 하며 옆에 부축해 서 있는 아내의 얼굴과 마주 서서 마치 이 마을의 모습들을 살피려는 듯 보이지 않는 눈을 크게 뜨다가 눈물이 글성해지는 얼굴에 웃음을 짓는 상이용사도 있었다.
(중략) 당국에서는 한 사람 앞 하루 세 홉씩 한달치씩의 식량과 한 사람 앞 담요 두 장 한세대 앞 한달치 부식비 삼(三)천 환 그리고 식기 등을 나누어 주었다. 돼지우리에 다섯 마리의 돼지가 여물통을 쑤셔대며 꿀꿀대고 닭장에서는 오십 마리의 닭이 모이를 쪼며 한낮의 정적을 곱게 흔들어주며 '꼬꾜' 울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노동력을 잃은 상이군인들을 위해서 거처는 물론 생활비도 부담했다. 그들의 자립을 위해 각 가구당 닭 50마리와 돼지 5마리도 제공했다. 입소 당시에 정부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그곳은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입소 1년을 기념해서 찾아간 기사 몇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졌다. 적어도 언론에서는 그렇다.
마을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
입소 10년이 가까워져 오는 1964년에야 기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1964년 7월 17일자에 '상이촌에 생업자금' 기사를 실으며 재향군인회가 실명의용촌에 생업자금을 지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실명의용촌 입주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기사 하나가 겨우 나온다. <매일경제>는 1976년 7월 1일자 '조달청장 수유 실명의용촌에 원호성품 전달'이라는 기사에서 조달청 직원들이 모은 성금으로 '블록 벽돌 제조 틀' 20대를 전달했다고 밝힌다.
실명의용촌 자료를 살펴보다 보니 오래전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내가 다닌 동원유치원은 어머니가 다닌 우이중앙교회 안에 있었다. 1960년대 초 경상북도 상주에서 올라온 우리 가족 중 어머니는 유독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어머니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는 교회 교인이 운영하던 달걀 가게에서만 달걀을 샀다. 아마 내가 유치원도 다니기 전,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달걀 사러 갔었는데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가게를 지키고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아저씨는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아줌마의 남편이었다.
혹시 그 가게가 있던 곳이 실명의용촌이 아니었을까. 당시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들과 선배에게 물어보니, 실명의용촌이라는 곳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고 다만 분위기가 좀 다른 동네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