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우리 사회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인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1991년 이른바 '열사정국'에서 열혈 운동권이 된 후 평생을 사회활동가로 살았다.
손우정
역사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기록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의 잔재와 민주화의 흐름이 혼합된, 꽤 긴 과도기를 경과해야 했다. 6월항쟁을 촉발한 박종철과 이한열의 안타까운 죽음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이름을 바꿔가며 멈추지 않았다.
1991년은 남달랐다. 그해 봄,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쓰러진 후 60일 동안 13명의 아까운 목숨이 분신하거나 의문사로 숨졌다. 세계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역사의 종말을 외치고 있었지만 한국 대학가는 분노에 휩싸인 시위대와 화염병, 돌과 최루탄을 떠나보내지 못했던, 여전한 항쟁의 시대였다.
시국 문제는 물론 학교 수업에도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대학생도 91년의 열사 정국을 피해가지 못했다. 우리 사회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이자 2017년 촛불시위 사회자였던 박진(49)도 그랬다.
"수원에서 서울까지 버스 타고 통학하면서 수업 빠지고 미사리에서 종일 놀다 오던 학생이었는데, 강경대가 그렇게 죽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분신하고 의문사하는 걸 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냥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91년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인권운동가는 되지 않았으리라. 박진은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운동을 그만둘 생각을 해 본 적 없이, 열심히 살겠다는 약속만은 실천하는 '활동가'로 살았다.
패배해도 지지는 않는 방법
정권의 폭력은 이겨도 엄한 부모님은 이길 자신이 없었던 박진은 졸업 후에도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에 골몰했다. 청년회 활동을 이어가다 전공(물론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은 없다)을 살려 1997년 변호사 사무실에 소속되어 송무(訟務)와 인권상담을 주로 하는 다산인권상담소에 들어갔다.
2000년에 다산인권상담소는 다산인권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독립해 온전히 인권 활동에 주력했다. 당연히 임금은 대폭 낮아졌지만 일은 훨씬 늘었다. 박진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사건,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 용산 참사, 쌍용차 사건 등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녔다. 23년이 지난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뭘까?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이었어요. 그때는 한번 현장에 들어가면 열흘은 있다가 나와야 했으니까 아예 7살 딸아이를 데리고 빈집에 들어가 살았어요. 그런데 피해자와 이웃으로 사는 경험을 하니까 너무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그전까지의 활동은 적이 있으니까 싸우는 식이었는데, 그때부터는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싸워야 한다'로 바뀌었어요. '영혼을 팔아서라도 꼭 이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박진은 인권 활동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피해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를 돕다 욕을 먹거나 뒤통수를 맞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운동을 떠나는 활동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평택 대추리에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승리의 가능성은 일 푼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다.
"어느 날 누가 '이기는 게 뭔데?', '지키는 게 뭔데?'하고 묻는데, 대답을 못했어요. 단순히 요구 조건이 수용되면 이기는 거고 아니면 패배하는 걸까? 한참을 생각해보니까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면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겠더라고요. 그때 이후로는 사건을 접할 때 단순히 이기는 것보다 피해자들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방법', '자존감을 잃지 않는 방법'을 더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