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헤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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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득했던 경험이 어쩌면 나를 다시 책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나쁜 생각들이 머리속을 가득 메웠던 그때, 나는 집에 있는 책들을 집어들었다. 처음 집어 들었던 책은 헤르만헤세의 책이었다.
뭔가 불교에 심취한 듯한 헤르만헤세의 글들이, 그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의 움직임같은 헤르만헤세의 책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극도의 집중을 요하는 헤세의 책은 나를 잡다한 나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그 어떤 직접적인 위로의 말도 없었지만 내 안에 있던 고독한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때 유명한 헤세의 책은 다 읽은 것 같았다.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유리알유희>,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렇게 나는 헤르만헤세에게 입덕했다. 어려운 책으로 시작한 독서 때문인지 그 다음부터는 뭔가 모르게 수월했다. 소설도 재미있었고, 심리학책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머리가 아프고 괴로울 때마다 정말 머리를 쥐어짜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집었다.
그 책을 이해가 갈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면 그 쾌감은 또 내 우울을 그만큼 날려주었다. 그렇게 나는 우울의 늪에서 조금씩 빠져나왔고, 그 길에 내 손을 잡아준 작가들에 입덕하여 그 팬심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이 책들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이건 내게 정리의 문제가 아닌 의리의 문제였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뽀 같아서 나를 살려준 책들을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뤘더랬다.
그 책에는 얼마나 줄도 벅벅 쳐 놓았는지 중고서점에서도 대놓고 '노' 할 만한 책들이라 이 책들이 갈 곳은 폐지함 뿐이니 그것도 가슴이 아팠다. 폐지함에 가느니 그냥 내가 끼고 있지, 하는 마음으로 우리집은 책 이외의 물건들만 정리하는 '책빼고 미니멀라이프'의 상태가 되어갔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책들을 떠나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고 나서다. 책장 속 내 소중한 책들은 참 어설프게 여기저기, 꼴사납게 크기도 못 맞추고 여기저기, 남우세스럽게도 로션, 면봉과 함께 여기저기 늘어 있었다.
이게 내가 말한 책에 대한 예의였고 의리였나 싶은 게 뭔가 모르게 착잡했다. 아이들 책에 치여서 자리도 못잡고 아무렇게나 꾸역꾸역 끼워져 있는 내 책은, 만화책 수집이 취미인 남편의 가지런한 만화책들 사이에서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그렇다고 아이들 책을 뺄 수는 없고 온 집안을 책으로 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내 책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찬찬히 눈에 담아 보았다. 마냥 끼고 살 수는 없는 책들이 도서관처럼 가지런하기는커녕 내 머릿속보다 더 어수선하게 끼어있는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대우도 제대로 못해주면서 책을 모으는 건 의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렇게 내 책과 이별하기로 결심했다. 나를 살려주었고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고 나에게 영감을 주었고 나를 글쓰게 만들었던 내 책들은 이미 내 머릿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SNS에 남아있으니 이제는 나의 미니멀라이프를 위해서 책을 줄여가는 것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어차피 내 뇌처럼 꾸미지 못할 바에야 꾸역꾸역 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욕심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내 책들과의 이별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아쉬움없이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도저히 처분하지 못할 만한 책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책을 꺼내니 몇백권은 족히 넘어보였다. 캐리어에 책을 담고 연휴 마지막날 아침, 나는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무거운 책을 넘기고 현금으로 받아든 몇 만 원에 이또한 행복해 하면서 소중한 나의 책들이 또 다른 독자에게 가서 또 다른 '숨'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 책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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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우울감... 나는 헤르만헤세에게 입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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