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 1. 19. 부산포로수용소에서 기간 병이 포로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깎아주고 있다.
NARA / 박도
간이 이발소 이야기
어린 시절 나는 부잣집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꽤나 호강스럽게 자랄 만도 한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좀 산다는 다른 집 애들은 주로 공부만 하게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린 내게 온갖 잔일을 다 시켰다.
쇠죽 끓이는 일, 꼴망태기 메고 소 꼴 뜯는 일, 산이나 강둑에서 소를 치는 일, 새참 나르는 일, 모내기 때 못줄 잡는 일, 디딜방아 찧는 일, 보리나 콩 추수 때 도리깨질, 논두렁에 콩 심는 일, 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 등, 당시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나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처럼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우리 집보다 훨씬 못사는 집에서도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는데, 왜 나는 가난한 집 자식 이상으로 막일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부끄러웠고 창피스러웠던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
그 무렵, 때때로 꼴망태기를 메고 가다가 내 또래 여자애를 보면 창피스러워 숨곤 했다. 역전에 사는 아이들은 검정 교복에 신발도 운동화요, 머리도 하이칼라(스포츠형)인데 나는 언제나 평상복에 고무신이요, 까까머리였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막깎기' 이발료도 아끼려고 나를 철길 건너 각산 홍씨네 무허가 이발소로 데리고 갔다. 그 집 헛간은 간이 이발소로 거적문을 올리면 맨땅바닥에 딱딱한 나무 의자만 덜렁 놓였을 뿐이다. 요즘 그 흔한 거울도 없었다.
홍 이발사는 이빨 빠진 바리캉으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마구 밀었다. 그 바리캉이 내 머리통을 전후좌우 마구 헤집고 누빌 때면, 두피가 따끔따끔하여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머리 깎는 일은 잠깐이면 끝났다. 그 뒤에 머리 감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