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전란으로 허물어진 집 섬돌에 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컬러 사진은 무척 귀했는데 NARA에 몇 장 소장돼 있었다(1951. 3. 1. 전주).
NARA
싸릿재 공동묘지로 간 여동생
그해(1950년) 가을, 피란에서 돌아온 집집마다 한두 식구가 보이지 않았다. 하구미인 임은동, 광평동, 사곡동, 형곡동 일대는 1950년 8월 16일 정오 무렵 미 공군 B-29 전폭기로부터 융단폭격을 당했다. 그래서 미처 피란치 못한 집은 가족들이 그 폭격으로 거지반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해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온 동네 집집마다 한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우리 앞집 김 목수 집 맏아들은 전쟁 중 행방불명됐다. 또 오거리 공씨네 술도가 집 외아들도, 그 옆집 참기름 집 아들도 전쟁 후 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귀엣말로는 그들은 좌익으로 전쟁 중에 죽었거나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나의 바로 밑 여동생이 피란에서 돌아오자마자 홍역으로 죽었다. 병원에 미처 가보지도 못한 채, 입은 옷 그대로 새끼줄에 꽁꽁 묶여 항아리에 담겨 사돈어른이 지게에 지고 도량동 싸릿재 공동묘지에 묻었다.
막내고모는 그 조카가 불쌍하다고 공동묘지에 가서 실컷 울고 돌아오곤 했다. 나도 그곳에 몇 차례 따라갔다. 피란에서 돌아온 뒤 많은 동네사람들이 경찰서로 불려갔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들에게 부역한 사람을 찾아 혼을 내거나 교도소로 보낸다고 했다.
하구미 임은동 조아무개는 전쟁 중 잠시 동인민위원장이라는 완장을 두르고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된통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매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곧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