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스마시, <하틀랜드>(반비, 2020, 18000원)
반비
우리는 가난하고, 그리고 여자로 태어났지. 이것만 해도 이 세상에서 우리 몸은 투 스트라이크를 당한 거야. 게다가 엄마는 남자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외모를 가졌고, 나는 원하지 않은 아이였으니, 안 그래도 위험한 세상에서 흔들리던 우리가 각각 원 스트라이크씩을 더 먹었지. 하지만 엄마는 자기가 쓰레기가 아니란 걸 알았어. 자기 딸도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도. - 130쪽
1977년 9월, 캔자스주 위치토시의 트레일러 주차장 옆 작은 교회에서 마흔다섯 살 난 농부 '아니'가 열세 살이나 어린 신부 베티와 결혼식을 올렸다. 베티는 나이는 서른둘이지만 여섯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해 온 여자였다. 두 사람의 혼인으로부터 5대에 걸친 세라 스마시(Sarah Smarsh)의, 가난으로 떠도는 가족사가 시작된다.
미국의 빈곤과 계급 그리고 '아메리칸드림'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단순히 한 가족의 그것에 그치지 않고 60, 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수십 년간 이어진 빈민들의 고통스러운 일상과 삶의 역사였다. 그것은 흔히들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 불리는 백인 노동 계급의 가난한 삶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사랑에 관한 세밀화였다.
세라 스마시는 <하틀랜드>를 15년간 썼다. 그는 공공 기록, 오래된 신문, 편지, 사진 등의 기록에서 조각들을 꿰어맞추고, 태어나기 이전 이야기는 가족들의 기억으로 재구성하여 이 세밀화를 복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태어나지 않은 영혼' 오거스트에게 구어체의 문장으로 이 오랜 빈곤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오거스트에게 "미국이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으로 급선회한 해에 태어"나 자신이 "도달한 삶의 결말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컸던 자신의 삶에서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와 결혼할 때, 베티가 열여섯에 임신했던 딸 지니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2년 뒤, 지니는 열여덟 살에 딸 세라를 낳았다. 세라의 모계에서 그녀의 성장을 도운 여자들 모두 10대에 엄마가 되어 위험한 세상에 아기를 내보낸 것이었다.
세라는 "평생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온 여자들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 여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전해져온 순환, 가난의 악순환과 함께 "자기도 어린아이면서 몸 안에 아기를 지니게 되는 운명의 굴레"도 상속했다. 그 가난과 삶을 증언하지만, 세라는 그것을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을 물려받은 지은이의 성장기가 예사로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베티가 딸을 데리고 60번도 넘게 이사하는 바람에 지니는 고등학교 때 48번이나 옮겨 다녔다. 세라도 엄마 지니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옮기기 전까지 캔자스의 두 카운티 안에서 21번이나 이사해야 했다.
가난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던 할머니, 어머니와 달리 세라는 자신의 삶을 "평등의 약속을 기반으로 세워진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아이로 살아가기"로 정의했다. 그는 어렸지만, 모계로 유전해 온 악순환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하겠다는 결심을 키워갔다.
늘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애썼던 세라는 어린 시절에 가난이라는 악몽, 심리적 위험뿐 아니라 죽음의 위험도 함께하는 현실 가운데 깨어 있어야 했다. 그가 10대 임신을 원하지 않은 것은 도덕적 수치감도 있었지만, 아이를 갖게 되면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에 장애물이 생길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은 가난한 아이에게 엇나가지 않고 올바로 사는 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해준다고 고백하는 세라는 "임신한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됐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상상의 딸을 그는 외할아버지 아니의 가운데 이름인 '오거스트(August)'로 불렀다. 오거스트는 '밝은 빛 같은 존재'이며 유머와 관대함을 타고난, 베티의 일곱 번째 남편이 됨으로써 외할아버지가 된 아니의 이름이었고, 그녀 자신이 태어난 달이기도 했다.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해야 할 때 세라는 자신에게 답을 구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냈다. 마음속의 딸 오거스트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내 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였다. 그는 그렇게 구한 답으로 청소년기의 "분노와 자기 파괴의 충동에 빠지기 직전"에 자기 삶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오거스트는 "불확실한 세상보다 더 고요한 존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