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창시자와 계승자들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이병길
경주 출신 최제우는 '내 마음 안에 한울(하느님)을 모시고 있다(시천주, 侍天主)'며 조선 민족의 머리에 세계 혁명적 대사상을 심었다. "양반과 상민, 천민 그리고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들 모든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吾心卽汝心, 오심즉여심: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모든 사람이 한울을 모시고 있으니 한울같이 섬겨라. 모든 인간 존재가 평등하다. 인간은 하늘과 같이 존엄하시다. 하느님은 하는님이시라 노는 님이 아니다. 하늘 위에서 눈도 꿈적 안 하며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사상은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한 서학(천주학)과 다른 동쪽의 사상, 즉 동학이다. 최제우는 '하늘과 같이 사람을 섬기라(사인여천, 事人如天)' 했고, 손병희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 人乃天)'했다. 동학의 인본주의적 사고는 계급철폐와 봉건제도의 타파를 지향하는 반봉건 사상이요, 척양척왜 반외세 사상이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괴질 대처법으로 "침을 아무 데나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라. 코나 침이 땅에 떨어졌거든 닦아 없애라. 먹던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을 새 국에 섞지 말라. … 이리하면 연달아 감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다. 괴질이 창궐하던 시기에 올바른 위생법을 알려 민중의 마음을 얻어 교세를 확장했다. 동학에 들어가면 괴질에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부패한 나라의 괴질의 해결법은 달라야 했다.
1894년 다시 대유행했다. 사람들은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얏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며 난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호열자 같은 부패 관리에 대한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민중들은 개벽을 기다렸다.
세상을 개벽하라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프랑스 유학 출신의 민족주의자 홍종우에 의해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암살당했다. 낡은 시대를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좌절됐다. 시신은 부관참시를 당하여 8도에 내걸렸는데, 참수된 머리는 서울 양하진 저잣거리에 홍종우가 쓴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 깃발과 함께 내걸렸다. 혁명의 실패는 죽음뿐이요, 남는 것은 이름이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1894년(고종 31) 4월 27일 조선왕조의 본관, 전주성에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 아래, 백성이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개벽의 봉홧불을 밝혔다. 괴질에 걸린 병든 사회를 개벽하기 위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위시한 농민군이 죽창을 들고 일어났다. 탐관오리 축출, 신분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농민의 반봉건 운동이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백산에서 동학 지도부는 격문을 발표했다.
"우리가 의로운 깃발을 들어 이곳에 온 것은 그 뜻이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어려움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
동학 농민군 세력에 정부는 노비제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 폐정 개혁을 요구한 농민군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갑오개혁(1894.7~1896.2)을 했다. 이때 조선 관군의 패배로 정부는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자, 이어 일본군도 들어왔다.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이제 수령 쫓아내기를 넘어서서, 아예 세상을 뒤집자며 다시 일어섰다. 자주적 정부 수립을 위해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개입으로 반봉건을 넘어 반외세 운동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막강한 일제의 기관총 앞에 죽창으로 이길 수 없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무참히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반봉건 반외세 정신으로 이후의 역사적 과제를 던졌다.
1894년 일본인 사쿠라이 군노스케는 <조선시사(朝鮮時事)>에서 "조선은 유럽 여러 나라들 사이에 끼어 쟁탈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은 이미 멸망의 도장이 찍힌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동양에 위치하여 의협심이 강한 일본 제국에 의지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복 있는 나라가 아닐 수 없다"라고 했다. 그는 또 "조선인은 대부분 일본인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때로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지만,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일본인을 자상한 아버지처럼 여기고 순순히 존경의 뜻을 표한다"라고 했다.
과연 조선사람 중 일부는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부산 사람들은 어떻게 일본과 만났을까?
부산 인근에도 동학운동이 있었다
전라도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에도 동학농민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동학농민군은 경상남도에까지 밀려왔고 부산의 일본인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부산과 가까운 창원에도 1894년 7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 두 명의 동학도가 경남 지역 각 읍을 순행하다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다녀간 읍과 관서에 창원(7월 29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25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항의가 동학당이 창원 등지에 모여 있다는 장계를 의정부에 올렸다.
울산의 언양에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1894년 8월 말 언양현 주민들이 봉기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아전들의 집을 불태웠다. 농민들의 공격 대상은 아전들이었다. 울산도호부사 한응주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전들의 관리 책임을 물어 언양현감 윤홍식은 파면됐다. 동학 관계자가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현감과 아전들을 투옥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해산시키면서 끝이 났다. 항쟁 이후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일정한 자치가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