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광주 북구 영락공원 묘지를 찾은 추모객이 이른 차례를 지내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하멜은 한가위를 조상 숭배의 시각에서 바라봤다.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은 조상에 대한 의례적 행위라는 차원에서 추석을 이해했다. 이 점은 그가 장례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추석 명절을 언급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추석이 조상 숭배의 날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런 관점으로만 추석을 대한 것은 아니다. 이날은 꽤 경쾌한 페스티벌의 날이기도 했다. 이 점은 정조(재위 1776~1800) 때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실학자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도 나타난다.
풍속학 서적인 이 책에서 유득공은 추석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신라 때 서라벌 여성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팔월대보름까지 한 달 동안 길쌈 대결을 한 뒤 패한 쪽이 술과 음식을 대접한 일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때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다했다"고 자기 시대의 추석 분위기를 묘사했다.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 역시 비슷하다. 홍석모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으로 지방 농가에서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생각한다"고 한 뒤 "황계(黃鷄)와 백주(白酒)로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즐긴다"고 추석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이 추석을 조상 숭배 겸 축제의 날로 인식한 데 반해, 하멜은 주로 조상 숭배 특히 무덤과 관련해서 이해했다. 그는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서 "무덤은 보통 4내지 5, 6피트 높이로 흙을 조그맣게 쌓아 올리고 정성껏 손질한다"며 "고관들의 무덤에는 비석과 석상이 세워지는데, 비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 집안의 내력 그리고 경력 등이 새겨진다"고 한 직후에 이렇게 서술했다.
"8월 15일에는 무덤의 풀을 베고 햅쌀로 제사 지낸다. 이 날은 그들에게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이다."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중반의 조선에 관해 꽤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예컨대, 당시 사람들이 서양 문화에 깊은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하멜 일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스님들과의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을 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또 효종 임금과 지방관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이 조선 사람들은 외국의 풍물에 대해 호기심이 몹시 많으며 듣고 싶어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역사책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외부세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서양이 조선의 문호를 노크하기 약 200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하멜은 위와 같이 정반대의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하멜은 여타 분야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면서도, 추석 명절을 포함한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지까지 쓰면서 조선을 세밀히 관찰하고 추석을 열세 번 보낸 사람치고는 추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관점을 내놓지 못했다.
<하멜 표류기>에 '추석이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이라고 쓴 것을 보면, 하멜 역시 추석의 축제적 성격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관점의 한계를 보인 것은 아무래도 이방인인 데다가 11년간 사실상 귀양생활을 하다 보니 인식의 확대에 제약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는 추석'보다는 '무덤의 풀을 베고 햅쌀로 제사지내는 추석'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게 각인됐을 수도 있다.
이방인들은 현지인들이 벌이는 축제 같은 '즐거운 행사'에는 쉽게 참여할 수 있지만, 장례식 같은 '슬픈 행사'에 참여하는 데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지의 '즐거운 행사'에 대한 이해력과 '슬픈 행사'에 대한 이해력이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멜이 신기해 한 풍경...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