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잡채가정집인데 잡채를 이만큼 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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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음식만 납죽납죽 받아먹던 어린이 시절, 내가 유일하게 한 '효도'가 있다. 엄마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명절이면 가끔 꺼낸다.
당시 명절이면 내 눈 앞에 펼쳐지던 풍경은 이랬다. 친척들이 하나둘 모인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부엌에서 분주하다. 당일에도 부엌에 가야지만 엄마를 볼 수 있다. 엄마는 내 말에 대꾸하는 걸 잊을 만큼 정신이 없다. 고모들은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상에 음식이 차려진다. 여전히 바쁜 사람은 하나다. 나는 궁금해진다. 할머니를 잡고 묻는다. "할머니, 왜 우리 엄마만 일 시켜? 고모들이 하라고 해." 순간 리모컨을 들고 있던 고모 일시 정지. 할머니가 말한다. "지지배가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잠시 멈춰 있던 엄마가 다시 부산하게 움직인다. 무려 20년도 한참 더 된 이야기다.
어린 내 눈에도 보이던 걸 할머니라고 보지 못하셨을까.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거다. 원래 명절 음식은 며느리 몫이니까. 우리 며느리는 묵묵히 잘하니까. 고모들은 음식 솜씨가 엄마보다 뛰어나지 못하니까. 큰 어른인 할머니의 함구와, 나머지의 암묵적인 동조 속에서 엄마의 명절 노동은 당연한 일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친가 쪽이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진행했다. 엄마는 사과를 모양 내 깎는다거나, 제기를 닦는다거나 하는 일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제사 없이도 하루 종일 부엌에서 종종 대긴 했지만.
머리가 좀 커 청소년이 되고 나서는 나도 명절이 싫어졌다. 엄마 혼자 지고 있는 명절 노동의 굴레를 보는 것도 지겨웠고, 엄마가 안쓰러워 내 손으로 돕는다 한들 한계가 있었다. 나는 부추를 썬다거나, 전감에 밀가루를 묻힌다거나 하는 부수적인 일만 돕고 결국은 엄마가 전면에 나서야 음식이 척척 만들어졌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음식을 매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마의 근처에서 일을 좀 도와보고 나서야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명절만 되면 해쓱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을 두 소쿠리 부치고 나니 나도 입맛이 떨어져 연거푸 사이다만 마셨다.
사이다로 배를 채운 명절 이후로 어떻게 해야 명절 노동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됐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외식을 극도로 싫어하셔서 명절 음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평소 김치를 나눈 엄마의 은덕(?)으로 전주에 사는 이모가 지원군이 됐다.
이모는 엄마만큼이나 요리를 잘하셨는데, 네 가족이 먹을 명절 음식을 두 배 이상 넉넉하게 만들어 나눠주셨다. 명절 이틀 전, 엄마는 퇴근길에 이모 집으로 명절 음식을 픽업하러 갔다. 이모는 묵은지 돼지고기 산적부터 닭봉 구이와 양념장까지 각종 음식을 정갈하게 통에 담아두고 엄마를 기다리셨다. 엄마는 그저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렸고 사정을 다 아는 이모는 "언니 힘내"라며 되려 엄마를 위로했다.
명절 슈퍼우먼은 없다, 아니 '필요 없다'
나는 돈을 벌게 된 이후로 명절이면 매번 '외식봇'이 됐다. 아 그냥 외식해요, 나가서 먹어요, 스님이 염불을 외듯 무슨 말만 하면 외식하잔 말을 달고 살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외식하지 않는 한 엄마의 명절 노동을 깰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음식 한 번 하지 않은 아빠가 음식을 하실 것인가, 이제 와서 고모들께 "오신 김에 명절 음식 좀 해주실래요?" 할 것인가. 아빠는 뭔 외식 타령이냐며 무안을 주실 때가 더 많았지만, 가끔은 속 느끼한데 아귀찜 시켜 먹자거나, 횟집에 가서 회나 먹자는 제안이 통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외식을 하러 나가면 엄마도 밥공기를 비웠다. 나는 그게 그렇게 보기 좋았다.
명절의 전환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얼마 전 엄마와 아빠가 각자의 인생을 살기로 한 거다. 나는 은밀하게 생각한다. 명절 스트레스도 두 분의 결별에 아주아주 미세하게나마 영향이 있었을 거라고.
나와 동생은 명절이면 두 배로 바빠졌다. 아빠도 뵙고 엄마도 뵈어야 하기 때문에. 명절 풍경도 바뀌었다. 외식이 기본이고 집밥은 옵션이다. 아빠를 뵙고 친척들을 뵙고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들러 인사드린 뒤 올라온다. 하루 쉬고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와도 자연스럽게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아래서 20대부터 고추장을 담그던 엄마가 많이 변했다. 엄마는 한동안 "전이라도 부쳐야 되는 거 아닌가...?" 불안해했다. 그럼 나는 "전은 무슨 전이야. 화덕피자 먹으러 가자"고 답했다. 남들 먹다 남은 전이 아니라 바삭한 화덕피자를 먹고, 기름 냄새가 몸에 배지 않는 명절을 보내자 엄마도 더 이상 전을 찾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