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서울역사박물관은 천주교 관련 근대유물 400여 점을 한자리에 전시하는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을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회는 교회사와 시대사, 도시사, 역사지리학의 다양한 성과를 아우르며, 천주교회사 전시로는 첫 행사라고 주최 쪽은 말했다. 전시회는 서소문 별곡과 동소문 별곡의 두 가지 테마로 진행된다. 사진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이 소장 중인 '황사영백서'.
연합뉴스
또 다른 사건은 '황사영 백서(帛書)사건'이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형 정약현의 딸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정조 14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을 포기, 주문모의 교화를 받아 전교에만 전념해 왔다.
황사영은 조정의 심한 탄압으로 교도들이 참혹하게 희생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국정부의 무력을 빌려 복수를 하고 교회의 세력을 회복함이 낫겠다는 불충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경주교에게 서신을 보내어 교화(敎禍)의 전말을 보고하고 원조를 요청키로 한 것이다.
황사영은 약 1개월 동안 고심한 나머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명주비단에 매행 110자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수록한 서한을 만들었다.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경제적으로 무력하므로 서양제국에 호소하여 성교홍통(聖敎弘通)의 자본을 얻고자 한다.
② 조선은 청국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으므로 청국황제의 명으로써 선교사를 조선에 받아들이도록 할 것.
③ 청이 조선을 병합하고 그 공주를 조선왕이 취하여 의관을 하나로 할 것.
④ 서양으로부터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 대포 기타 필수 병기를 가지고 와서 조선국왕에게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의 입국을 자유롭게 해줄 것 등이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북경을 왕래하는 역졸에게 부탁하여 천주교 본부에 보내기로 작모하다가 관헌에 의해 체포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황사영은 비록 신교(信敎)의 자유라는 신앙상의 목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안위에 관한 매국적인 글을 썼다가 극악무도한 역적으로 몰려 목을 잘린 뒤에 시체마저 여섯 토막으로 잘리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