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덕정 과거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로 세종 30년(1448년)에 지어졌다.
박기철
1947년 3.1운동 기념행사
이 날 오전 11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제 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3.1절 바로 직전인 2월 23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도했다. 이 민전의 공동 의장이자 3.1절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안세훈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자주 통일 민주국가 수립'과 '미군정 등 외세 척결'을 외쳤다. 이 행사에 모인 인원은 최대 3만명에 달했다. 당시 제주도 총 인구가 27~3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승만 학당 교수이기도 한 김용삼(2017)은 제주도에 공산세력이 만연했다고 말한다. 민중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주도를 '좌익의 온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좌익 세력이 주최한 행사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같은 책에서 조선공산당이 해방 직후 공산혁명 달성을 위해 '급진적인 파업과 극렬 투쟁'으로 일관하여 민심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한 내에 공산주의 혐오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민심을 잃었다고 하면서 제주도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선동에 넘어갔다고 하니 앞뒤가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3.1절 행사 준비위원회에는 좌익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제주감찰청 부청장이었던 김차봉 경감 등을 비롯해 검경 관계자와 우익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3.1절 행사에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것은 오히려 미군정이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군정은 연이은 실정으로 민중들의 반발심과 분노를 키웠다. 대표적인 실정이 식량 정책이었다. 혼란스러운 시기, 미군정은 아무런 통제나 조정 장치 없이 식량에 대해 자유거래를 허용했다. 이 때문에 매점매석과 독점이 심해졌고 물가는 미친듯이 뛰었다.
1945년 9월 한 말에 9.4원이던 쌀값이 다음해 9월에는 2800원까지 뛴다. 이렇게 시장이 망가지자 미군정은 급히 자유 거래를 중단하고 미곡 수집령과 배급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이 미곡 수집령은 일제 시대 공출보다도 더 가혹했다. 게다가 일반 시세의 4분의 1도 안되는 수매가를 책정해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배급 받은 곡식에도 석탄 가루와 모래 등이 섞여 있어 탈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김용삼의 논리 구조를 그대로 적용하면 민중들의 분노와 반발은 미군정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좌익세력은 그 대척점에서 민중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이런 민중들이 3.1절 기념행사에 운집하게 된 것이다.
내 말은 남로당이나 공산주의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제쳐두고 당시 제주 상황을 좌익세력들이 주민들을 선전, 선동한 결과로만 단순화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분, 관덕정의 총소리
3.1절 기념식이 끝난 이후 사람들은 읍내 중심인 관덕정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지금은 옛 제주목 관아가 복원되어 있었만 당시만 해도 제주 경찰서가 있었다.
행렬이 관덕정을 지나던 2시 45분 쯤, 사건이 터진다. 기마 경찰 중 임영관 경위로 알려진 경찰관이 한 소녀를 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찰은 다친 소녀를 보지 못했는지 그냥 지나가려 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항의했고 그 경찰관은 군중을 피해 말을 몰아 경찰서 쪽으로 피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근처 망루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던 경찰이 총을 발사한다.
이 총격으로 총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제대로 된 진상조사는 제쳐두고 바로 강경진압으로 돌입했다. 사건 당일 오후 7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사건 다음 날인 3월 2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25명을 잡아들였다.
3월 14일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이 제주로 온다. 그리고 3월 19일에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주요 내용은 3월 1일 관덕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는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한 시위대에 대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이러한 발표는 사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