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신라 왕족 김씨의 시조 알지가 출현한 계림의 야경
정만진
하지만 '하늘이 탈해왕에게 아들로 보내준' 알지는 임금이 되지 못했다. 김씨가 임금자리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197년이나 뒤인 262년(미추왕 원년)이었다. 이는 알지가 김씨의 시조라는 것, 그가 65년에 태어났다는 것, 탈해왕이 그를 임금 재목으로 생각했다는 것(금빛 상자에 담겨 출현했고, 하늘이 준 아들로 여겼다는 점) 모두를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김기흥은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진흥왕 6년(545) 국사를 편찬할 무렵에도 (신라에서는) 아직 성씨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진흥왕 본인에게도 아직 성씨가 없었는데 그보다 480년이나 전인 65년(탈해왕 9)에 그의 조상 알지가 김씨를 썼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418년(눌지왕 2) 왕의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구하러 고구려와 왜국에 간 인물이 <삼국사기>에는 박제상,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판단의 또 다른 근거가 된다.
기원전 인물의 생몰연월일을 과연 알 수 있을까
알지의 출생 시기와 성씨에 관한 의문을 보면, 그보다 훨씬 아득한 옛날인 기원전 사람의 생몰 연월일을 아는 것은 불가능할 듯 여겨진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 탄생에 원류 역할을 한 베르길리우스의 생몰 연월인은 <다음 백과> 등에 기원전 70년 10월 15일과 기원전 19년 9월 21일로 명기되어 있다.
놀라운 일이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그렇게 밝혀놓지는 않았을 터이고, 무언가 분명한 자료를 토대로 삼았을 것이다. 김부식이 '왕의 명령을 받아(命老臣, 삼국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모아서 책을 만든다(俾之編集)'고 하였듯이, 베르길리우스의 생몰 연월일을 적어놓은 어떤 고문서를 참조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 글이 그 원전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지는 않으므로 본래의 집필 방향에 맞추어 어눌한 문장을 이어갈까 한다.
그리스 궁벽한 황무지가 서양인의 이상향으로 부각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미완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를 통해 서양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문호이지만, 필자는 그가 인류의 자연회귀 사상에 미친 영향에 주목 한다. 그는 <아이네이스>에서 아르카디아(Arcadia)를 낙원으로 제시했다. 그 후 아르카디아는 2000년에 걸쳐 서양인들이 꿈에도 가고 싶어한 이상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