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권우성
이른바 현대성(modernity)의 주요 키워드는 이동성(mobility)과 역동성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1960년대 도시에서 시골로 시집와서 시골의 갑갑함, 그러니까 정주성을 혐오하셨다. 필자도 어릴 적에 우리의 이순신상은 서구의 세련되고 역동적인 조각상에 비해 촌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필자의 어머니는 그 갑갑한 시골에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필자도 너무나 유동적이고 사진3처럼 불안정한 현재의 삶에 지쳐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이동성, 유동성, 역동성에 지쳐있는 인류의 무의식을 읽어내어 출현한 것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인류는 동물이지만 언제나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움직일 때와 머무를 때가 있다. 인류의 움직임(mobility)을 주목하는 문화 전통은 인간의 모습 속에서 호랑이, 사자, 곰, 독수리 등을 본다. 반대로 조선 시대의 선비처럼 인류의 움직이지 않음(stability)에 주목하는 문화 전통은 인류에게서 매, 난, 국, 죽, 또는 돌과 꽃들의 모습을 본다.
또 인류의 마음속에는 무리 지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동시에 나 홀로 호젓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공존해 왔다.
성서에서 말하는 바벨탑의 이야기는 신앙인들에게는 신벌로 이해가 되겠지만 사실상,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이중적인 속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이 이야기는 함께 모여 살기, 즉, 도시화와 문명화를 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함께 모여 사는 불편함과 흩어져서 제각기 살고 싶은 인간의 이중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18세기, 19세기 유럽의 목가 시인들은 호젓한 전원생활을 꿈꾸며 노래하였고 2,500년 전의 노자는 지금의 기준으로서는 별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기술과 문명을 멀리할 것을 가르쳤다.
도회에서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기적인' 개체들이 모이면서 교환이 일어난다. 그것이 물물교환이든 정신적 교환이든 세균의 교환이든 말이다. 성서에서 도시를 창녀에 비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간혹 바람직하지 않은 '더러운' 교환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럽다'라는 것은 반드시 위생적으로 '더럽다'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부정적(不正的)인 교환이 자주 일어난다는 뜻이다. 전염병학자들이 지적하듯 중세 흑사병 전파경로와 상인들의 교역 루트는 상당 부분 일치한다. 현재 코로나 19의 전파도 교역의 허브인 도시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류가 이제 노자의 가르침이나 18세기, 19세기 어느 전원시인의 꿈대로 반(反)문명적인 목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강박적으로 이동성과 역동성, 만남, 소통을 강조하는 "밈"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류를 지배하는 "밈" 아래에서 인류의 무의식 일부는 안정성을 갈구하고 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꿈의 직장은 공무원이며, 자영업자들의 꿈은 월급은 적더라도 고정적인 수입을 원하고 있다. 전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인과 영국인들도 그저 자기 울타리 안에서의 행복한 삶을 바라고 있다.'
이동성(mobility), 역동성, 만남, 소통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인류는 예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키워드를 강조하기도 하고 소홀히 여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이동성, 역동성, 만남, 소통을 지상의 선으로 생각하는 "밈"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만나고 소통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70억 인류가 하나의 몸을 가졌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몸은 떨어져 있되 마음만은 하나가 되면 어떨까? 70억 인류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것도 역시 끔찍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라면 그것은 빅뱅 이전의 상황일 테고 이동성, 역동성, 만남, 소통이라는 단어는 쓸데없는 말이 된다.
필자는 이동성(mobility), 역동성, 만남, 소통을 중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 19와는 별개로 이동성(mobility), 역동성, 만남, 소통을 적정수준에서 안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개체 간에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거리가 있고 각 개체가 안정화 되어있어야 이동, 만남, 소통이 가능하고 두 개체 간의 관계가 역동적이고 상호적일 수 있다. 두 개체 또는 세 개체, 또는 집단 내 또는 집단 간 안정화를 깨는 소통 또는 이동은 아니 함만 못할지 모른다.
*참고: 영어의 'mobility'는 이동성 또는 유동성을 의미하는데 이글에서는 이동성으로 번역하였다.
[관련 기사]
①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대전환의 시대'가 될 것이다 http://omn.kr/1nh1v
②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정의하기 전에 따져야 할 것 http://omn.kr/1opm1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멕시코 국립대 중남미 지역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상기 대학 스페인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