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1896~1934)
세계한민족문화대전
1934년 9월 20일, 랴오닝성 환인(桓仁)현 대랍자구(大拉子溝)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장군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포위돼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했다. 향년 38세. 20대 초반에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양세봉은 전투의 현장에서 죽었다.
그는 조선혁명군으로 싸운 다섯 해 동안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과 8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일본군 1000여 명을 죽였고, 흥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를 승리를 이끈 이였다. 독립군이 좌우로 갈려 좌익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을 때, 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운 독립군은 그의 휘하 조선혁명군 500명뿐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잘못을 관대하게 감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욕설로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병사들에게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잎담배를 피운 지휘관이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가장 오랜 기간 항전을 이어감으로써 일본군 최대의 표적이 된 독립군이었다.
남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계열로 좌우익 대립의 중심을 지켜, 좌익으로부터 '극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헌신은 김일성까지 움직였다. 만주에서 좌익의 실책을 지적해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한 김일성을 성찰에 이르게 한 것도 양세봉이었다. 그가 남의 현충원과 북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된 이유다.
양세봉은 평안북도 철산 사람이다. 호는 벽해(碧海), 본명 외에 양서봉(梁瑞鳳), 양윤봉(梁允奉)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6살 때 부친을 여읜 그는 스물에 혼인했으나 가난으로 호구가 어려워지자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 영릉에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1919년 봄 홍묘자(紅廟子)로 옮겼다. 국내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립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해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1922년 겨울, 양세봉은 의주·삭주·귀성군의 국경선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에 참여함으로써 이후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진 항일 무장투쟁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는 의주군 옥상면 주재소 습격, 유수동 습격전 등에 참가하면서 전투를 익혔다.
일제의 이른바 '토벌'이 시작되자, 천마산대는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해 서간도 지역의 무장 독립군을 통합한 광복군총영(총영장 오동진 1889~1944, 1962 대한민국장)과 합류했다. '광복군 철마 별영'으로 편제된 뒤 양세봉은 별영의 검사관으로 의용군의 훈련을 맡아 독립군 전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그는 소대장으로 국내 진입 작전에 참여했다. 1929년, 남북 만주 일대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통합해 랴오닝성 신빈현 흥경에 본부를 두고 조직된 국민부 소속 군대로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자 제1중대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