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시험 응시생 보호작전(?)2021년도 제85회 의사국가시험 실기시험 첫날인 8일 서울 광진구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으로 응시생과 관계자들이 섞여 들어가고 있다. 국시원측은 응시생들의 신원노출을 우려해 시험장 주변에 대기한 관계자들과 응시생을 섞어서 함께 입장시켰다.
연합뉴스
한국에서 의료는 사회보장제도의 일부로 공공재로 제공된다. 의료가 가진 특성인 불확실성, 정보의 비대칭성, 속인성(개인성) 등을 바탕으로 국가 또는 공적 기관이 개입하여 교섭 창구를 집합화한 것이 공적의료보험이며 대부분의 국가가 의료서비스를 공공재로 규정하여 공적 관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건강보험 제도를 적용하고 자유 접근(free access)이 보장되며 진료보수로 공적 가격(의료수가)이 지불되고 있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지 43년 동안 전국 어느 곳에 있든지 같은 가격으로 동질의 의료서비스를 공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중요한 국가책무 중 하나가 될 것이란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정권은 100대 국정과제 중 45번 과제로 공공의료기관 확충 및 지역사회 중심 의료체계 강화와 지역 간 의료서비스 격차 해소를 목표로 '의료공공성 확보 및 환자 중심 의료서비스 제공'을 약속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높아진 공공의료 및 필수의료 확충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호응하기 위해 21대 총선에서 여당은 필수진료와 공공의료 취약지역을 중심으로 의대 정원 증원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정청은 총선압승과 코로나19 진정국면을 계기로 7월 23일부터 향후 10년간 한시적으로 4000명의 의대 정원 증원 및 국립공공의대 신설 방안을 합의, 발표했다. 그 내용은 새로 증원하는 의대생 400명 중 300명을 '지역의사제 특별전형'으로 뽑아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고 추후 지역의 중증·필수 의료 분야에서 10년간 의무 복무하도록 하며, 나머지 50명은 역학 조사관 및 중증외상 등 특수전문 분야로, 50명은 의과학자로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계획에 크게 반발했고, 전공의들을 중심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9월 4일 정부와 여당은 대한의사협회와 협상 끝에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등을 코로나 19가 안정화된 이후 의정 협의체를 꾸려 원점에서 재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공공주체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체계인 유럽과 달리 의료기관의 90% 이상이 민간기관인 한국의 경우는 제공자인 민간기관과 정책당국 간의 신뢰 관계가 밑바탕이 되어야 공백 없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데 방향타를 잃은 의사증원 정책과 공공재 제공 책무를 방기한 의사단체 간의 일시적 봉합에 국민은 실망했고 실타래는 제대로 얽혀버렸다. 왜 이렇게 엉클어진 걸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왜 이렇게 엉켰을까] 방향타 없는 공공의료 기득권 의사단체에 백기 투항
첫째, 의사를 증원해서 얻으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당사자는 물론 국민들에게조차 공유되지 못했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공공의료 확충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날로 높아져 가는 그야말로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호기였음에도, 목표와 방향의 설정 및 정책 패키지가 정리되지 못한 채 단순히 의사 수부터 늘리겠다는 정부안에 의사단체는 물론 보건의료시민단체조차도 불만을 표출했다.
기존 의대에 정원을 늘리는 방식의 공공의료 확충에 대학은 물론 병원, 시민단체들도 별 반발이 없을 것이라는 실로 안이한 대응이었다. 무엇보다 지역 의사로 키워진 인력들이 의무복무 기간 10년을 채운 후 또다시 수도권 등 대도시권으로 쏠리게 되면 공공의료 강화와 의사의 지역 불균형이 가능하겠냐는 국민의 불신에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둘째, 레시피도 논의 테이블도 공론화도 없었다. '의사 수 증원'이 의사 파업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온 데에는 의료정책과 관련된 각각의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확인하고 논의하기 위한 근거자료와 논의 테이블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의사 수가 부족한지 충분한지, 지역별로 의료(요양)니즈에 대응한 의사 수는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 등을 논의할 수준의 근거자료도 없었고 레시피가 없으니 만나서 토론하여 합의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정책의 우선순위조차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수치와 논거들이 일방적으로 제시되며 충돌하게 되었고 국민들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단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의료의 지역 불균형 및 진료과목의 편중 해소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임에도, 공공의료와 의사 부족으로 고민하는 지자체장의 목소리는 없었고 지역주민의 호소도 청취하려 하지 않았다.
셋째, '전교 1등'의 직업윤리 앞에 공공정책이 굴복했다. 이번 의사단체들의 집단휴진 과정을 보면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이 공동체의 기본원칙을 허물었다는 우려와 탄식, 분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구적으로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10년간 한시적으로 증원했을 때 늘어나는 의사 수는 전체 의사 수의 약 3%에 불과하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의사를 증원하고 지역별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가 높아진 시점에서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던 정부에게 의사단체들은 '정책 철회'를 조건으로 대화를 거부했고,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으로 쌓아 올린 신뢰를 훼손하는 자충수를 두게 된 것이다.
의료법 제15조를 보면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여 진료 거부 금지를 법에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환자를 위하여'가 의사의 최대 사명이며 단순한 법령준수(compliance)를 넘어 의사의 '직업윤리'를 규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방향타 없는 의사증원과 부실한 공론화 과정으로 정책추진의 원동력을 상실한 정부와 여당은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비우면서 시민에 대한 책임 의식을 던져버린 의사단체에 백기 투항했다.
의사증원이나 공공 의대 설립과 같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공공정책은 의사 파업 앞에 멈춰서는 안 된다. 하루빨리 의정 협의체를 가동해서 공공의료의 강화방안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공의료 확충을 통한 삶의 질 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