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은평시민신문 정민구
그러나 사람들은 느린 신문을 애타게 기다린다. 금요일만 되면 신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전화가 쇄도한다. 그런 반응은 반반일 것이다. 인터넷을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옥천신문만이 옥천 소식을 전달해주는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터넷이 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에서 포털과 SNS를 눈 뒤집어 찾아봐도 제대로 된 옥천 소식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다.
느리게 배달되는 신문이지만, 한 주 동안 소비된다. 대판 24면에 타블로이드 24면의 옥천 곳곳의 소식을 쫙 끌어다 채운 콘텐츠는 일주일 내에 읽어도 다 못 읽는다. 빨간 줄을 쳐가면서 아는 사람 나오면 찍어서 알려주고, 이래저래 지역 소식을 건강하게 유통시킨다. 그러면서 광고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구독이 받쳐주니까. 여론이 형성되니까. 그리고 '옥천신문에 나온 그거 봤어' 이 한두 마디에 매체의 신뢰도는 깊어지고 영향력은 넓어진다.
디지털은 이미 옛날 말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나오고 있다. 화질이 어떻다 저떻다. 넷플릭스, 왓챠, 디즈니 등 OTT(오티티, 온라인동영상서비스)들이 어떻다저떻다. 천지가 요동치도록 기술개발 다른 세상을 귀가 따갑도록 외치고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신문이 구독돼도 그런 소식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세상은 그렇지만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열 걸음'으로 뚜벅뚜벅 가고 있다. 빨리 가서 성과도 내고 싶고 새로운 세상도 보고 싶은 갈망, 내 창의성을 맘껏 뽐내고 싶고 그로 인해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 게 욕망이라 그렇게 변해간다.
그런데 뒤처지는 사람들, 선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새로운 스마트폰, 새로운 화질의 티브이에 열광할 때 글을 몰라 신문도 언감생심 볼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문해교육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복지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을 뿐이다.
티브이가 나오니까, 음성으로 들어도 되니까 과연 상관없을까. 읽고 쓰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세상에서 그것이 과연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빠르게 가다 보니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놓치고 만다. 다 끌고 갈 수는 없고 뒤처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놓고 간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곤 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무엇이 대이고 무엇이 소란 말일까.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매체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돈이 되는 쪽으로 진화하게 되어 있다. 돈 되는 것이 아무래도 지속가능하고 확장가능하니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돈이 나오는 곳이 블랙홀로 작동한다. 구독료는 일천하고 뭉텅이로 들어오는 광고료가 크니까 광고료에 쏠리게 되어 있고, 기타 수익사업 등이 한꺼번에 돈이 들어오니까 감질나는 구독료는 성에 안 찰 것이다. 이미 여러 신문들이 구독은 하면 할수록 손해인 구조이다. 그 정도 두께의 종이신문을 내면서 구독료는 단가에도 못 미칠 것이다.
종이신문은 죽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왕창 종이신문을 여전히 찍어내는 이유는 광고 시장 때문이다. 광고료 비중이 80~90% 가량 되니 광고를 위해 찍어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가운데 옥천신문은 광고도 잘 붙는 신문은 아니지만, 그나마 재정 비율의 50% 이상이 구독료다. 참 특이한 신문임에는 틀림없다. 사람들이 한 푼 한 푼 매달 내는 구독료로 봐주니까 신문이 버티고 있는 거다. 이런 재정구조이기 때문에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광고주 등 자본가나 권력에 아쉬운 말할 것 없이 언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뉴미디어의 이야기는 정말 엄청 나온다. 이리 쓸리듯 저리 쓸리듯 명멸하는 매체는 정말 많을 것이다. 휩쓸리지 말고 기본을 지켰으면 좋겠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다.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같이 가려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원칙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언론을 하는지 말이다.
종이신문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라면 깔개로도 쓰이고 농산물 말릴 때도 쓰이고 음식 덮을 때도, 포장하는 할머니들의 일자리로, 폐지 줍는 노인들의 일거리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아니, 죽지 않아야 하며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의 소외계층이 남아있고 성 밖의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