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전에 봉안된 정조대왕 영정
전용호
정조는 유능한 임금이었다.
세종에 이어 두 번째로 문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아들의 외척까지 '손을 봐'서 정치적으로 태평성대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를 뒤주에 갇혀 죽이도록 한 세력의 울안에서 권좌에 올랐다. 아무리 영민한 군왕이라도 꿈꾸던 개혁정치를 펴기 어려운 정국이었다.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이도록 한 기득권 세력이 요로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사회의 전환기에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정부기관 외에 별도로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고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사상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는 전시대에 이룩한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는 한편, 선진문명을 일구어 내고 있던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여 상호 보완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그가 탁월한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당대의 어느 학자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흔여덟 살, 왕위에 오른 지 24년 만이다. 7년 전부터 온 몸에 종기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현기증과 두통에 시달려왔다. 『정조실록』이나 노론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밀찰'에서도 병세의 내용이 적혀 있다. 또 다른 견해도 전한다. 이른바 독살설이다. 수 년 동안 앓아온 종기로 갑자기 죽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