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이다.
김철관
정약용은 학문적으로 경학에 바탕하면서 서학을 수용하고 애민정신을 갖고 있는 보기드문 학자이지만, 친가와 외가, 처가에 이르기까지 상류층 양반계급 출신이다. 여종이 남의 호박을 따다 죽을 쓰는 등의 궁핍한 때도 있었으나 곧 관직에 나가면서 그리고 부친이 복직하면서 다시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 시골 마을에 들어서니, 이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흉년이라 해도 백성들의 생활상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관리들의 탐학과 수탈이 가중되었다.
"그가 백성의 참혹한 현실과 관료의 포악한 착취를 직시하고 백성을 굶주림과 착취로부터 다시 살려내고자 하는 인식은 바로 그의 실학정신이 터져나오는 출발점이 되었고, 그의 실학이 지향하는 목표이자 그가 완수해야 할 시대적 사명으로 깨달았다." (주석 1)
짧은 기간이지만 암행어사의 직분은 그의 학문과 사상형성에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때 그가 한 일이 또 있었다. 삭녕군수 강명길과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을 발고한 것이다. 강명길은 정조의 어머니 병환을 보살피는 태의(太醫)였고, 김양직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이장할 때 지사(地師)여서,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임금의 뒷배를 믿고 각종 비리를 저지르다 정약용에게 적발된 것이다.
주위에서 말렸다. 결국 임금의 총애로 헛공사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고, 어느 재상은 임금에게 이들을 처벌하지 말 것을 아뢰었다. 정약용은 그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상소문을 통해 비리 공직자의 처벌을 강력히 요청했다. 「경근어사복명후론사소(京近御史復命後論事梳)」의 요지다.
그들이 진실로 옳다면 임금님께서 무엇 때문에 저를 어사로 보내셨습니까. 이들을 총애하고 비호함을 방자하여 이와 같이 방자하였습니다.(…) 이미 탄로되어 어사의 보고서에 올랐는데도 끝내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장차 날개를 펴고 꼬리를 치며 양양하여 다시는 자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의 적용은 마땅히 임금의 가까운 신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형벌을 내리게 하여, 민생을 소중히 여기고 국법을 높이신다면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약용의 강력한 의지로 응분의 처분을 받았다. 그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집안 사람이 마전에 있는 향교터가 명당이라 하여 그에게 바쳐 묘자리로 쓰게 하기 위해 고을의 선비들을 협박, 결국 향교를 옮기게 된 일을 적발하고, 그의 탐욕과 죄상을 밝혀냈다. 노론 벽파인 서용보는 영조 때 대사헌 등을 지냈고, 정조 사후 순조 때 우의정으로서 신해박해를 주도하면서 정약용을 탄압했다. 이때의 일을 보복한 것이다.
주석
1> 금장태, 앞의 책,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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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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