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화재 당시에 그려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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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물 많던 런던, 거기서 난 대화재... 두려움에 떤 국민들
당시 런던은 도로가 좁을 뿐 아니라 도로 양쪽에 목조 건물이 많았다. 그래서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불길이 금방 번지다 보니, 주민들의 당혹감과 공포심도 클 수밖에 없었다. 옥스퍼드대 베일리얼칼리지에서 수학하고 <식물지> 등을 저술한 문필가인 존 에블린(John Evelyn, 1620~1706)은 당시 상황을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위 논문에 인용된 내용이다.
"맹렬한 화염이 내는 소음과 타닥타닥 소리와 천둥 같은 굉음,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비명, 황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탑이며 집이며 교회 건물의 붕괴, 이는 무시무시한 폭풍 같았다. 주위의 대기마저 뜨겁고 붉게 물들었다."
대화재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영국 스튜어트왕조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영국판 시민혁명이자 영국 내란으로도 불리는 청교도혁명(1642~1649)의 막판에 올리버 크롬웰이 등장해 군주인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포한 뒤, 일종의 총통인 호민관이 돼 독재정치를 펴다가 1658년 세상을 떠났던 탓이다.
이후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아버지를 세습했지만, 리처드는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망명을 끝내고 귀국해 스튜어트 왕조를 복원했다. 이로 인한 어수선함은 6년 뒤의 런던 대화재 직전까지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또 대화재 1년 전에는 '런던 대역병'이 이 도시를 기습했다. 흑사병의 일종인 이 전염병으로 인해 런던에서 희생된 사람이 당시 보고로만 6만8000명, 오늘날 추산으로는 약 8만 명 이상이나 됐다. 이 상태에서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까지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재 당시의 영국은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찰스2세가 보여준 빛나는 리더십
당시 런던에서는 '위기의 심화'로 인해 '정보에 대한 수요'와 더불어 '정보 공급원'의 숫자도 함께 폭증했다. 유언비어가 확산되기 좋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속에서 가톨릭교도나 광신자 혹은 프랑스인이나 네덜란드인이 불을 질렀거나 도왔을 거라는 음모론이 유언비어 형태로 확산됐다.
이 상황은 사람들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시민들이 집단 싸움을 위해 공격 대형을 갖추는 일도 생겨났고, 길거리를 다니는 외국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사건도 많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25세의 프랑스인인 로베르 위베르(Robert Hubert)가 방화 용의자로 체포됐다. 런던을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이 의심을 사서 사람들이 붙들었던 것이다.
위베르는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판사인 헨리 킬링(Henry Keeling)은 자백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 판사가 소신을 펼 수 없었다. 판사는 결국 사형을 선고했고, 10월 29일 처형이 집행됐다.
얼마 뒤에야, 위베르가 화재 발생 2일 뒤 런던에 도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됐다. 위베르의 자백은 자의에 의한 자백이 아니었던 것이다. 발화 현장에서 빵집을 운영했으며 화덕 불을 제대로 끄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주민 토머스 패리너(Thomas Farrinor)를 의심해볼 만도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정황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