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대구노동학교에서 열린 청년회의소 모임 사진으로, 동그라미 표시된 사람이 현진건이고, 그의 뒤 왼쪽 검은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이상화이다. (윤장근, <대구문단인물사> 사진)
윤장근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빈처〉 〈고향〉 등을 남긴 소설가 현진건은 1900년 9월 2일(주1)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7개월 뒤인 1901년 4월 5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의 시인 이상화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현진건과 이상화는 1917년 백기만 등과 더불어 습작을 등사하여 제작한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행하면서 문학소년기를 함께 보냈다. 이들은 1922년에 창간된 〈백조(白潮)〉 동인으로도 함께 활동했다. (주2)
두 사람의 인연은 이승을 떠나는 날 더욱 기가 막히게 전개되었다. 1943년 4월 25일 아침 이상화는 대구 중구 서성로 6-1 (현재 '상화 고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택에서 운명했다. 같은 날 밤 현진건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현진건> |
1936년 8월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독일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세계를 제패했을 때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본 국기를 삭제하고 게재한 사건이다. 당시 총독부는 이 사건을 동아일보 탄압 구실로 사용하여 동아일보를 무기정간 시켰다.
이 사건의 직접 책임자인 현진건을 비롯하여 이길용(李吉用)·최승만(崔承萬)·신낙균(申樂均)·서영호(徐永鎬) 등 5명은 "① 언론기관에 일체 참석하지 않는다. ② 시말서를 쓴다. ③ 만약 또 다른 운동에 참가했을 때는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받을 것을 각오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강요당하고 1936년 9월 26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현진건은 1939년 소설『흑치상지(黑齒常之)』를 연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것은 백제 때 장군 '흑치상지'가 자기의 모국인 백제가 망하자, 의병을 일으켜 국가를 회복하려고 의병 3만을 결합하여 당장 소정방(蘇定方)에 항거하여 백제의 2백여 성을 회복했던 사실을 소재로 한 것이다. 『흑치상지』는 일경의 탄압으로 인해 52회로 게재 중지되어 미완으로 남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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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한 가지가 '일장기 말소 사건(日章旗抹消事件)'이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을 때 동아일보 사회부장이던 현진건은 동료 이길용‧신낙균‧백운선‧이상범‧서영호‧장용서‧임병철‧최승만‧송덕수 등과 함께 신문에 게재할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구속되어 40여 일에 걸친 문초를 받았다.
현진건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1936년 전후 무렵 특히 불우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던 형 현정건이 일제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45세(1932년)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윤치호의 조카인 형수 윤덕경도 남편 사후 41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인은 연재하던 장편소설 〈흑치상지〉가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중단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손댄 양계장과 미두(米豆, 현물 없이 거래를 하는 일종의 투기)에 실패하여 집도 날렸다.
현진건은 우리나라 초기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현진건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의 대표 정체성은 소설가이다. 그는 민족성 짙은 사실주의 소설을 남긴 우리나라 1920년대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21세(1921년)에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 24세에 〈운수 좋은 날〉, 25세에 〈불〉, 26세에 〈고향〉을 발표했다. 38~39세에 집필한 장편소설 〈무영탑〉을 41세에 출간했고, 39세~40세에 장편소설 〈흑치상지〉를 연재하다가 마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