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사진은 2017년 8월 22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회고록 출간 기자간담회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는 모습.
남소연
한나라당 당명은 민주공화당 당명 다음으로 오래 사용됐다. 이 당명은 2008년부터 4년간은 집권당 당명이었지만, 그 이전의 11년간은 야당 당명이었다. 한나라당 명칭이 사용된 시기에 이 당에는 독재자나 집권자는 없었지만, 이회창이라는 강력한 대선후보가 있었다.
이회창은 1997년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에게,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두 번 다 근소한 차이였다. 이회창이 38.7%를 득표한 1997년에 김대중은 40.3%를 기록했고, 46.6%를 기록한 2002년에 노무현은 48.9%를 기록했다. 이회창의 득표력은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 2007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음에도 15.1%나 득표한 사실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은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법치주의에 대한 열망이 분출하는 속에서 검사 출신인 홍준표와 더불어 국민적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냉전적 사고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열망을 표상했기 때문에 김대중과도 얼마든지 제휴할 수 있었다. 대쪽 판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법치주의 열망을 대변했다는 점이 이회창 득표력의 결정적 비결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보수정당 입장에서 볼 때, 대선에서 2연패한 1997년 이후는 '국민의 힘'(촛불혁명)을 경험한 2016년 이후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힘든 기간이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당명을 오래 쓸 수 있었던 것은 이회창이라는 안정적인 대선후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이 처한 객관적 조건은 불안정해도 리더십이 비교적 안정적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보수정당 당명의 존속 기간이 리더십의 안정성과 직결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래통합당이 지금 시점에서 채택하는 당명은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교적 오래 유지된 당명인 자유당·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한나라당이 어느 시점에 채택됐는가를 보면 그 점이 드러난다.
자유당이라는 당명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2월 채택됐지만, 이 시점은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전쟁이 소강 국면에 들어간 뒤였다. 또 국회 내에 지지 세력이 별로 없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 연장을 위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 1952년 1월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1951년 12월은 이승만의 리더십이 안정적인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 당명이 등장했고, 이것은 그 후 9년간 제1당 당명으로 사용됐다.
17년간 장수한 민주공화당 당명도 5.16 쿠데타 2년 뒤부터 사용됐다. 민주정의당 당명도 1979년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의 권력 기반이 안정된 1981년부터 사용됐다.
한나라당 당명 역시 1997년 9월 30일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이 총재직을 인수하고 11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한 뒤인 1997년 11월 21일부터 사용됐다. 이회창의 당이 된 뒤부터 한나라당 당명이 사용됐던 것.
리더십이 공고해진 뒤에 채택된 당명이 수명을 오래 유지했다는 지금까지의 패턴은, 당명이 당을 안정되게 하는 게 아니라 당이 당명을 안정되게 한다는 당연한 결론을 생각나게 한다.
지금, 미래통합당의 리더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