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소식을 전한 <신한민보>(1934.1.4.)한국독립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해 쌍성을 공격했다. 만주국군은 항복하고 일본군은 저항하다 22명이 사망했다. 한중연합군은 많은 군수품을 빼앗았다.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군은 공격을 위해, 또는 전술적 퇴각과 방어를 위해 끊임없이 행군했다. 만주사변 후 편제돼 북만주에서 동만주까지 넓은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국독립군은 전술적으로 행군을 많이 했다. 훈련 받지 않고 한국독립군 참모가 된 조경한은 하루 100리 이상 걷지 못했는데 만주 망명 후 160리까지 걸었다고 한다. 독립군에 참여한 뒤엔 200리, 많은 때는 300리까지 강행군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의 회고(<백강회고록>)는 이렇다.
"발바닥이 붓고 밤톨처럼 부르터 오르고 두 다리며 전체의 고통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항상 낙오가 되어 숙영지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 … 더욱이 추운 겨울에 방한복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히지도 않는 썩은 조밥 두어 젓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편히 쉬지도 못한 몸으로 경우에는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행군하게 되면 등이 춥고 배가 고프고 다리, 발바닥의 지독한 자극을 받아 … 결국 또 다시 낙오[한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던 조경한은 300리, 곧 120킬로미터(약 118km) 행군이 힘들어 낙오되었고 특히 주린 상태에서 강추위 속의 야간 행군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정치 활동으로 전환할까 고민까지 했다는 것이다.
동만주로 근거지를 옮기는 행군은 길도 없이 눈 덮인 긴 산악지대를 4일에 걸쳐 돌파하는 강행군이었다.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의 연합항일실기>(<신한민보> 1934.1.18.)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상으로부터 액목 장산 사이에서 종횡하야 전혀 선로가 없었다. 하물며 적설이 무릎 위에 올라오매 실로 행군하기 어려웠다. … 음식에 대하여는 매 1인이 쌀가루 두 되와 소금 닷 냥 중을 휴대하여 배가 고픈 쌀가루를 눈에 섞어 먹고 지났다. 이와 같이 4일 만에 비로소 목적지인 장산의 험한 길을 지났었다."
조경한은 '썩은 조밥'이라 했는데 뒤 기록은 '쌀가루(건량)와 소금'이 식량이라 했다. 행군 상황에 따라 식량은 달랐지만 한겨울 눈 속의 산악 강행군은 한국독립군의 일반적 전술 행군이었다.
"쌀가루를 하얀 눈에 섞어 먹으며 행군"
한국독립군은 군수 물자를 일만군에게서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북만주는 동포 마을이 남만주보다 상대적으로 집중해 있지 않아서 동포 사회의 행정조직을 통한 장기적 지원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일만군이 북만주를 거의 장악하면서 동포 사회의 지원도 더욱 어렵게 됐다. 따라서 적을 공격해 군수물자를 노획하여 독립군 군수품을 강화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중국군과 동포 사회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후 무기와 식량을 전투를 통해 확보했다. 쌍성전투, 동경성전투, 동녕현전투 등 공성 전투에서 이기면서 한중연합군이 일만군에게서 많은 군수품을 빼앗았다. 장거리 행군으로 고지에 매복해 일본군 간도파견대를 공격한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 중 가장 많은 군수품을 빼앗았다.
두 차례 쌍성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식량 등 겨울을 지낼 많은 군수물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2차 쌍성전투 때 일본군 비행기 여러 대의 공습을 앞세운 반공으로 연합군은 오상현 충하진까지 퇴각했다. 조경한(<백강회고록>)은 4일간 300여 리를 적이 추격해 왔다고 했다.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군수품과 마필의 손실이 컸다. 곧 퇴각 과정에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이동 중 군수물자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300리면 120킬로미터인데 지도상으로 쌍성에서 충하진까지 직선으로 150킬로미터 정도다. 퇴각 때 우회 은폐로 등을 고려하면 실제 행군 거리는 그 이상이다. 하루 50킬러미터 정도를 행군하며 나흘 뒤에 퇴각에 성공했다. 처음에 많은 군수품을 지니고 이동했지만 뒤에는 포기하고 신속한 행군을 택했다.
동만주로 옮긴 뒤에도 한국독립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해 적을 공격해서 식량 등 군수품을 확보했다. 식량이 풍족하지는 않았다. 조경한은 '줄곧 썩은 조밥, 강냉이죽, 건량, 소금, 산채'를 먹어 영양부족이었고 했다.
한국독립군은 항일반만군 '토벌'로 악명 높던 일본군 간도파견대의 이동 정보를 확보했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한 사람이 사흘분 건량을 준비하고 270리 산림지대를 사흘간 돌파해서 매복했다. 대전자령전투의 준비였다. 하지만 비가 와서 일본군 출발이 늦어졌다. 한국독립군과 구국군은 삼림 속 식용버섯으로 허기를 달래며 사흘 동안 매복진을 풀지 않았다.
날이 개고 출발한 일본군은 결국 한중연합군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다. 공세적 행군과 배고픔 속에서도 매복진을 유지한 것이 승전의 전술적 요인이었다. 이 때 많은 군수품을 확보하고 한중연합군은 나자구로 들어갔다. 이후 구국군 사령부와 항일산림대 등이 나자구 일대로 집결하면서 나자구는 항일반만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많은 군수품 확보가 그 기반이 되었다 하겠다.
한국독립군은 근거지를 고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장거리 행군을 기본전술로 삼았다. 활동 근거지를 북만에서 동만으로 옮기기도 했고, 적의 이동 정보를 확보한 뒤 공격 장소를 선점하는 공세적 행군도 있었다. 병력 충원을 위해 동포 사회의 근거지 확보를 담보하면서도 식량 등 군수물자를 적과 싸워 획득하는 전술을 썼다. 이는 공격적 행군을 바탕으로 했다. '빠른 발'은 한국독립군 승전의 기본 조건이었다.
산악지대 기반으로, 장거리 행군 중심으로 한 한국 군인들
조선혁명군도 전술적으로 행군을 중시했다. 특히 북만주보다 빨리 일만군의 포위망이 구축된 남만주에서 조선혁명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하며 공격과 방어를 배합해서 치열하게 항일전을 전개했다. 전투 초기에는 빈현 영릉가 등지에서 승전하며 공방전을 전개했는데, 연합한 항일중국군의 방어전선이 무너지며 조선혁명군은 통화현에서 퇴각해 산림지대로 들어갔다.
행군대열에 참가했던 계기화의 회고(<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로 보면 이렇다. 퇴각 초기에는 행군이 빠르지 못했다. 9대 우마차에 군수품을 싣고 사령부와 직할부대가 먼저 이동했고, 강전자에서 주둔하며 각 중대 병력이 집결했다. 이후 단일부대로 행군했는데 노일령으로 이동하다 적과 교전하여 전사자가 여럿 나왔다. 사령관 양세봉은 쉬지 않고 바로 입산했으면 전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중대 지휘관들에게 이후 신속한 행군을 전술적으로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