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주 팔면통중앙 타원 부분이 팔면통이고 옆으로 목릉하(穆陵河)가 흐른다. 안중근 의사가 한때 살던 곳으로 항일의식이 높은 동포마을이었다. 팔면통 동포들은 독립군 북정의 숨은 공로자였다.
이중연 (1차 저작권 텍사스대학교)
독립군을 아낌없이 지원한 팔면통 동포들
팔면통 동포들은 노령으로 가는 모든 독립군 부대에게 의복과 신발을 마련해주고 정성껏 후원했다(<나의 회상기 일편>). 의군부와 독군부의 연합부대는 나자구에서 노령으로 행군을 시작했는데 며칠 만에 식량이 떨어졌다. 일본군이 추격해 오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팔면통으로 행군했다. 김재규의 회고(<의군부>)에 따르면, 행군 중 중국군이 길을 막기도 했는데 그들은 "조선 독립군들은 국가 독립을 목적으로 저와 같이 동삼(한겨울)에도 홑옷을 입고, 초신(짚신)을 신고, 식료가 없이도 생사를 내놓고 싸우니 언제든지 국가를 독립하고야 말 것이니, 그들을 조금이라도 대항치 말라"고 하며 길을 내주었다. 팔면통으로 들어간 뒤에 동포들이 마련해준 군수품이 도착해서 비로소 마음껏 먹고 겨울옷을 입었다.
군비단은 청산리전투 이후 1921년 봄부터 부대원을 여덟 차례에 걸쳐 노령으로 파송했다. 대부분이 비무장이어서 행군은 더욱 간고했다. 군비단은 실전 경험이 있는 장교가 매우 적었다. 255명이 이동하는데 장교는 3명이고 대부분 훈련 받지 못한 신병이었다. 이들은 낮에는 인적 드문 곳에서 머물고 밤에 행군했다. 일본군이나 중국군이 앞길에 없을 때는 강행군을 했다. 다른 독립군부대에서 낙오한 병사나 신입 병사들 57명이 합류해 노령 이만에 도착할 때는 312명이 되었다.(주5) 강상진부대 36명이 행군할 때는 <행군요략(行軍要略)>이란 행군지침서를 준비해서 지도와 함께 지니고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도 주로 밤에 행군해서 굶기를 예사로 하며 노령 이만에 도착했다(강상진, <군비단>).
만주에서 노령 이만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일은 출발 지점과 군사 상황, 행군 노선 등에 따라 다르다. 군비단 임표부대는 안도현에서 노야령을 넘어 영안, 목릉, 밀산, 호림을 거쳐 이만까지 2천여 리를 35일 만에 도착했다. 군비단 강상진부대는 장백현에서 이만까지 3700여 리를 100일 걸려 이만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에서 10월 말에 행군을 시작해서 한 달 남짓 걸려 팔면통에 도착했다. 안도현에서 출발한 대한의용군은 팔면통을 경유해서 밀산까지 한 달 정도 행군하여 도착했다. 북로군정서와 대한의용군은 팔면통에서 밀산으로 행군하여 그곳에서 부대를 통합해 단일부대로 만들었고 곧 국경을 넘어 이만으로 진입했다.
팔면통까지의 행군은 간고하고 급박한 산악 행군이었지만 이후 행군은 군세를 정돈하면서, 또 뒤이어 오는 부대를 기다리며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강근은 팔면통에서 20일, 밀산에서 20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나의 회상기 일편>). 이 때는 각 독립군단이 북정하면서 후술하듯이 부대 통합과 최종 근거지를 정하기 위한 모색이 진행했다. 따라서 일본군 추격이 급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행군을 조절했다.
이상으로 보면 각 독립군은 2000-3700여 리의 거리를 한 달 남짓에서 몇 달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 대한의용군, 임표 군비단의 행군이 신속했다. 팔면통까지의 행군은 빠르고 그 뒤에는 상대적으로 늦었는데 임표 군비단만 이만까지 행군이 빨랐다. 1921년 봄에 행군을 시작했고, 또 이만이라는 목표 지점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대들은 한겨울에 팔면통까지 극도의 고난의 행군을 했고 이후 식량과 군복 등 군수품을 마련해서 군세를 정돈하고 노령으로 넘어갔다.
독립군은 북정으로 새 근거지를 만들고 부대 통합을 이루어냈다
독립군의 노령 이동은 전략적 장정이었다. 일본군의 대부대의 포위가 가중되고 학살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독립군의 새 근거지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장정은 불가피한 퇴각이었지만, 단순한 퇴각이 아니라 행군 과정에서 여러 독립군단의 통합을 일구어내고, 나아가 근거지를 확보하는 이중의 군사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 북정은 장기항전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창출했다.
첫째, 독립군의 통합은 행군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산리전투 전에 독립군 통합이 목표로 제시되었지만 통합에 이르지는 못했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군사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정하고, 홍범도부대와 국민회군, 신민단 등이 연합해서 봉오동전투를 치렀지만 부대 통합은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겪으면서 분산된 항전력으로는 대규모 일본군과 싸워 결정적 승전을 이끌기 힘들다는 군사적 판단 아래 부대가 이동하는 곳에서 통합이 이루어졌다. 최초의 통합은 홍범도부대와 서로군정서(교성대), 흥업단이다. 행군 노선에 따라 홍범도부대가 안도현에 도착한 직후 대한의용군이 결성되었다. 이어 밀산과 호림의 접경지대 십리와에서 대한의용군과 북로군정서 지휘부가 만나 통합을 시작했고 며칠 후 호림 도목구에서 통합부대를 편제했다.(주6)
부대 통합 후 곧 이만으로 행군해서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주 독립군과 노령 항일군 각 부대가 모여 통합을 위한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큰 뜻을 위해 독립군단을 통합하려는 만주 독립군의 뜻과 달리 노령의 부대는 군사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고 실제 만주, 노령을 아우르는 통일된 독립군단을 결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령으로 이동하기 전의 독립군 통합은 실제 부대 통합이 실현되고 장차 독립군 통합의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뜻이 깊었다. 이를테면 백순(白純)이 임시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밀산에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통일하여 대한독립군'을 결성하고 노령으로 진입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어서(주7)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해 독립운동 지도부에서 독립군 통합에 대해 기대하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둘째, 비록 노령에서 대규모 통합군단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만주 독립군의 북정은 군사 활동 근거지의 확장이란 점에서 뜻 깊었다. 이르쿠츠크의 고려혁명군관학교를 통해 만주에서 불가능하게 된 사관 양성을 지속했다. 만주 독립군의 참여로 노령의 항전력도 강화되었다. 만주의 근거지 강화는 북정하지 않은 재류 독립군과 노령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만주로 귀환한 지휘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독립군 주력부대가 북정에 성공함으로써 독립군 절멸을 기도했던 일본군의 만주 침략은 실패했다. 행군 과정에서 통합을 통해 독립군은 역량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행군은 새 근거지를 담보하려는 노력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만난 부대는 힘을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강상진(<군비단>)은 북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머나먼 거리를 허다한 시련을 타승하고 도보 행군해 온 과정도 실지 행동상 혁명의 새길, 새 방향을 확신한 투쟁성이었고 자체의 발전 수준을 제고시키는 주요 행정에서는 본위 관념이 없이 동지를 흡수하고 적임자를 서슴없이 등용함으로써 실력을 튼튼케 한 주장도 특점이었으니 시대적 인식이 있는 누구를 물론하고 우리 사회에서 유래하던 이전의 각 단색(團色)을 벗어나서 합치할 수 있는 새 길을 활발히 열어 놓았던 것이다.
군비단은 이만에 도착해서 북로군정서 지휘관(북로군정서 지휘부 일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다시 국경 근처 만주로 돌아갔다)들을 사관 양성을 위해 초청하기도 했다. 새 근거지에서 다른 독립군단 지휘관들과 힘을 합해 군인을 양성하려 했다. 비록 성사되지 못하고 뒤에 이용, 한운용 등과 협력해 군인을 양성했는데, 당시 행군을 통해 새 근거지를 확보한 독립군부대가 다른 부대와 함께 새로운 항일전쟁의 전망을 모색하던 노력을 알 수 있다. 각 독립군은 새 근거지 상황에 맞추어 경신참변 이후의 항일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독립군의 북정은 군사적 퇴각이었지만 독립전쟁의 전략·전술로 볼 때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새 근거지를 만들고 각 독립군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힘을 합해 통합부대를 만들어 장기항전으로 나아가는 바탕이 되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중국공산당의 장정이 유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1920년 겨울 독립군의 북정은 침략군에 대한 독립군의 전략적 장정으로 뜻이 컸다. 경신참변 때 독립군과 동포의 희생은 행군 속에 독립전쟁의 결의로 승화되어 장기항전을 이어갔다.
(주)
1)박영석, <<한 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97-98쪽.
2)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36쪽.
3)박영석, 위의 책, 100-101쪽.
4)김두찬, <논픽션 오광선장군>, <<신동아>> 1971년 2월호, 236-237쪽; 김승빈, <中領(중국령)에서 進行된 朝鮮解放運動>.
5)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95, 100-101쪽.
6)김승빈, 위의 글; 박환, <김혁의 민족의식 형성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002, 248쪽.
7)<백순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 1921년 12월 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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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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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속에서 싸우고 행군한 독립군, 그들을 지켜 낸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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