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출병사>에 나타난 일본군 아즈마지대 부대 편제일본군 소장이 지휘하는 아즈마지대(東支隊)는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다.
공훈전자사료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하고 총부리를 무고한 만주동포에게 돌린 일본군
일본군의 학살은 만주 침략 때부터 있었지만 규모나 잔학함에 있어 청산리전투가 영향을 줬다. 곧 전투에 패배한 일본군이 그 화를 만주 동포에게 돌려 분풀이로 대규모로 학살했던 것이다. 계기화는 '청산리 패전의 보복'으로 일본군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여 (...) 청산리전역의 수십 배의 혈(血)의 대가'를 치렀으며 자신의 마을에서도 9명이 희생되었다고 회고(<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했다.
임시정부 파견원의 통계를 보면 각지 피살자 수는 몇 명, 몇십 명이 대부분인데 전투 지역인 청산리는 409명, 완루구는 451명이었다(어랑촌은 미상). 또 북로군정서 경비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왕청현 서대포도 230명으로 다수였다. 이 세 곳만 해도 1000명 이상이다. 청산리나 완루구의 피살자는 남만주 유하현 전체 43명, 흥경현 전체 305명보다 많고, 관전현 전체 495명에 조금 적었다(<독립신문> 1920.12.18.).
백운평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백운평 마을 23세대 남자들은 젖먹이까지 모두 집에다 가두어 불을 질렀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은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으로 사격해 학살을 자행했다(주5). 청산리와 완루구의 400여 명의 피살자는 전투지역 인근의 동포를 일본군이 무차별 학살한 결과였다.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성공적으로 퇴각하자 일본군은 총부리를 무고한 동포들에게 돌렸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작전 성과 표에도 청산리전투 뒤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이 드러나고 있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여러 곳에서 동포를 살해했는데 그 때는 소량이지만 소총, 권총, 탄약, 화약 등의 압수품이 있었다.
청산리전투 뒤인 27일부터 압수품도 없이 각지에서 학살한 기록이 나온다. 곧 무조건 학살하고 마을을 뒤졌는데도 무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를테면 증거도 없이 10월 27일 10명이 살해되고 28일 5명이 살해되었다. 30일에도 6명이 증거품 없이 살해되었다. 이는 일본군이 동포 마을을 공격해 무조건 학살한 뒤에 현장에서 총이나 탄약이 발견되면 '노획품'으로 기록하고, 없으면 그냥 살해로 기록했다는 뜻이다. 이들 지역이 청산리전투 지역은 아니지만 청산리전투 패전은 만주 침략 일본군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에 이은 2차 독립군 기지 파괴 - '보호' 강요와 '집단 귀순'
'귀순' 외에 독립전쟁의 기반을 약화시킨 계기는 '보호'였다. '보호'는 동포 마을이 일제의 행정 관할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곧 독립군단의 행정 관할을 포기하고 일제 행정 관할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동포 학살 등 일본군의 무력이 뒷받침되었다.
일제 기록을 보면 11월 초에는 '보호원'을 내는 마을이 거의 없다가 중순에 늘기 시작해서 하순에 급증했다. 이는 학살이 진행, 확산되면서 각 동포 마을이 생존을 위해 일제 관할 구역이 되는 '보호원'을 제출한 것을 뜻한다. '보호원 제출'은 일본군의 학살의 결과였다. 연길현과 화룡현은 154개 마을의 3779호, 2만2432명이 일제 관할이 되었다(기밀제52호).
일본군 만주 침략의 본질이 여기서 드러난다. 곧 한편으로 독립군을 '토벌'한다 했지만 실제 독립군 주력은 전투를 피해서 먼저 북정에 나서고, 또는 이도구에서 일본군에게 승전한 후에 북정을 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을 좌절시켰는데, 일본군은 군사작전 패배의 화를 동포마을에 돌려 독립전쟁의 기반이던 동포 사회를 파괴했다.
일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학살당한다는 상징을 확산시키면서 이를 두려워한 동포 마을들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관할함으로써 독립전쟁의 기반을 파괴했다. 일본군의 1차 작전 목표는 실패했지만 학살을 통해 일제는 2차 목표인 독립전쟁의 기반을 파괴했다. 남만주와 달리 경신참변 이후 북만주의 독립전쟁 기반이 상대적으로 늦게 회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포 마을이 일제 관할에 들어가면서 독립진영 인사들은 일제의 '귀순', 곧 변절 강요에 직면했다. 독립군의 군사 활동과 더불어 그를 뒷받침하는 행정 활동도 일시 정지되었고, 역으로 보민회 등 일제 주구기관 활동은 일본군의 뒷받침에 힘입어 강화되었다.
'용정촌 귀순자 취급사무소'의 통계(공신제237호)에 따르면 기간 미상의 시기에 화룡현에서 207명, 연길현에서 213명이 '귀순'했는데 소속 단체로 보면 국민회 193명, 군정서 94명, 의군단 68명, 의민단 5명, 광복단 5명, 독군부 4명, 신민단 1명, 독립군 1명, 계 376명이었다.
북만주에서 세력이 강성하던 국민회와 군정서가 다수인데 '귀순' 때 제출한 물품을 보면 권총 4정, 권총 탄환 13발, 지휘도 2개, 러시아식 소총 4정, 러시아 탄약 399발, 군모 4개 등이었다. 경비대 등도 무장을 갖추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군수품은 거의 제출되지 않았다. 곧 '귀순자' 대부분이 독립군이 아니라 행정 관계자였다. 일제는 독립군단 '말단'이라고 파악('기밀제52호')했다.
1921년 일제 간도영사관 국자가분관(分館)이 작성한 '귀순자명부'(기밀제4호)는 951명의 소속과 임무까지 적었는데. 국민회 494명, 의군단 234명, 북로군정서 172명, 도독부 27명, 신민단 4명, 의민단 4명, 기타 소속 미상 12명이다. 군인으로 명기되었거나 군인이 확실한 인원은 국민회 72명, 북로군정서 43명(사관학교졸업 졸업 12명 포함), 의군단 32명(山砲隊 포함), 도독부 15명이다. 전체 인원 가운데 군인 비율은 국민회 14.6%, 북로군정서 25%, 의군단 13.7%이고, 도독부는 55.6%이다. 합하면 18.4%이다. 도독부에서 군인의 '귀순' 비율이 높은 것은 도독부가 군사 중심으로 지방행정 조직이 넓게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율을 따지만 10명 가운데 2명이 군인, 8명이 행정요원이다. 여기서 군인은 농사지으며 지역을 지키는 재향군인이다. 이들은 지역을 떠나기 힘든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다. 북로군정서 사관학교 졸업생도 졸업 후 지역에 잔류한 인원이다. 150명이 지역에 잔류했는데 그 중 12명이다. 정규 의용군은 아니지만 거주지를 떠나 피신할 수 없었던 모연대(募捐隊)와 경호대를 포함하면 군사 관련 인원의 '귀순' 비율은 더 높다.
일본군이 중화기로 무장하고 지역을 초토화하는 상황에서 피신하지 못할 때 이들은 생존을 위해 '귀순'을 택했다. 이런 '귀순'도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약화시켰지만 모두가 일본의 밀정 따위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귀순'의 편차가 존재했다.
당시 일본군·일경의 정책으로 보면 '귀순'하면 그들의 주구가 되는 것이다. 곧 '불령선인 취급 방침'에 따르면 이들이 다시 독립운동에 나설 물리적 기반은 차단되어 있다. '귀순' 조건은 이러했다('비밀공제30호').
1.귀순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자신이 종래 해온 불령행동(독립운동: 인용자)을 자세히 자백하고 증거 물건 있으면 그것을 제공할 것.
2.귀순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보민회(保民會) 또는 농업조합에 가입하여 회(會)의 보증서를 제공할 것. 단 보민회나 농업조합 따위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기한을 두고 입회 수속을 한다고 맹세할 것.
3.충심으로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장래 결코 불령행동(독립운동: 인용자)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것.
4.장래 가능한대로 불령선인(독립운동가: 인용자)의 행동을 탐사 밀보(密報)한다고 맹세할 것.
활동 진술과 독립운동 포기는 말로 그치지만 보민회 따위의 일제 밀정조직에 가입하고 독립지사를 정탐, 밀고하는 것은 '귀순'이 곧 변절임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밀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학살이 극심한 상황에서 이들의 '귀순'을 모두 밀정이 되는 것으로 단언할 수는 없다. 생존을 위한 일순간의 '귀순'과 밀정이 되는 '귀순'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집단 귀순'이란 점에서 독립운동 근거지의 항일전투력은 뚜렷하게 약화되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땅에 묻었던 총기를 비롯하여 많은 군수품이 압수됐다. '귀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증거 물건'이었으므로 '귀순자'들을 통해 총을 비롯해 많은 군수품이 일본군에게 압수됐다. 이후 북만주 항일전쟁 수행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귀순자'가 모두 밀정이 되지는 않더라도 '집단'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항전 역량은 약화됐다. 앞서 국자가분관의 '명부'는 951명이라 했는데 두도구분관은 11월 25일 보고문서(공신제177호)에서 6858명이 '귀순'했다고 밝혔다. 이도구, 두도구, 세린하, 삼도구 지역 294개 마을에서 7000명 가까이 '귀순'했던 것이다. 청산리전투가 전개되던 지역임을 감안할 때, 전투 여파가 부근 마을에 영향을 주어 실제 독립군단 인원이 아님에도,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피해 '생존'을 위한 '귀순'을 선택했다. 북만주 전체로 보면 수만 명에 이른다 하겠다.
일본군의 학살은 결국 생존을 위한 '집단 귀순'을 강요했고 이를 통해 또 독립 근거지는 더욱 파괴됐다. 일제의 만주 침략이 노린 궁극의 목표가 여기에 있었다. 1920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의 학살은 3.1혁명 때 학살의 연장이었고 중일전쟁 때 남경대학살의 예고이기도 했다.
(주)
1)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8, 91쪽.
2)마띵, <견문기>(리광인, <'경신대토벌'과 연변 조선족 군중의 반'토벌'투쟁>, <한국학연구 4>, 1992, 127쪽에서 재인용).
3)조선총독부경무국, <군대 출동 후 간도 불령선인단체의 상황>, 김정주 편, <조선통치사료 8>, 한국사료연구소, 1971, 273-280쪽.
4)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 45> 1998년 겨울호, 54쪽.
5)황민호·홍선표,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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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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