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 저격 장소(옛 만주상세지도)아래 타원 부분의 화살표 위치가 총독 저격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국내 남산동 건너 중국 하활용개 지역의 지세가 가파르게 높은 곳이다. 중앙 위쪽의 노란 표시가 집안현성이다.
이중연 (1차 저작권 텍사스대학교)
공격 지점은 압록강 건너 중국 산꼭대기였다. 적의 경계를 피하면서 전술적으로 공격에 유리한 곳이었다. 작전 직후 가장 빠른 5월 20일 치 기사(1924.5.20.)는 '위원군 마시(馬嘶) 대안의 중국 산위'라고 했다. 이튿날 기사(1924.5.21.)는 고산진에서 50리 거리의 대안 '하활용익(河活龍益)의 낭떠러지 언덕'이라고 했다. 평북도지사의 보고('평북고 제8894호')는 '강계군 고산면 남산동(南山洞) 마시리 대안, 중국 측 집안현 아래 합룡개(合龍蓋) 약 20정(丁) 하류 압록강안 무명산 산복'이라고 했다.
중국 지명으로는 이의준이 피체된 후의 기사(1926.12.28.)는 '집안현 융화보(融化保) 대랑곡(大狼谷)의 강안'이라고 했다. 이의준, 김창균의 재판 과정을 자세히 전한 기사(1927.10.28.)는 '집안현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이라 했다. 김창균이 집안현 융화보에 거주했으므로 실제 김창균, 이의준이 밝힌 장소가 중국 지명으로 '집안현 융화보 사랑곡(대랑곡) 팔합목'이었다 하겠다.
이후 조선 총독들은 저격이 무서워서 압록강을 순시하지 않았다
압록강을 현지 답사한 오기영 <동아일보> 기자는 공격 지점의 지세를 이렇게 기록했다(주2).
강계로 흘러들어가는 운성강(雲成江)이 찢겨나가고 이름 없는 섬(島)을 지나니 여기가 강계군 고산면 대안의 중국땅 집안현 사랑곡 팔합목으로 그전 조선총독 재등(齋藤: 사이토) 씨가 국경순시를 하다가 쏟아지는 총알에 간담이 서늘하던 곳이란다. … 참의부원이 숨어서 총을 발사하였다는 중국편의 까마아득히 높은 산은 짐작컨대 해발 이천 척(尺)을 훨씬 넘으리라. 꼭대기는 나오고 들어가 제물에 포대(砲臺)를 이루고 나무조차 무성하였으니 기나긴 강안에서 이런 지대를 택하여 몸을 감추고 계획을 단행한 백광운의 눈도 넓은 것을 알겠다.
6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인데 우거진 나무 사이에 몸을 감추고 사격하기 좋은 지세였다는 것이다. 강안의 낮은 구릉은 일경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따라서 경비망을 뚫은 뒤 매복 저격하기도 좋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평북도지사의 보고에도 '암석이 많고 올라가기 어렵지만 산위에서는 선박을 내려다보고 저격하기 가장 좋은 지점'이라고 했다.
저격하기 좋지만 저격 명중률을 담보하는 곳은 아니었다. 작전부대는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유효 사거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군이 많이 쓰던 소총은 러시아 모신나강으로 다른 소총보다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도 높았다. 유효 사거리도 750미터 정도로 저격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그렇지만 600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폭 100미터 안팎의 압록강 가운데를 운항하는 엔진동력선, 그 위에 있는 사람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평북도지사의 보고는 사격 지점에서 배까지 거리를 600미터로 봤다. 공격받았지만 "여러 발이…앞배 오른쪽 2~3간(間) 앞의 물속에 떨어지거나 삼서(森西) 경부와 강전(岡田) 순사부장의 귀를 스치고 배 위를 날아갔다"라고 기록했다. 거리가 멀어 명중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를 축소하는 일제 보고임을 감안하면, 일경을 사살하지는 못했지만 부상시켰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공격은 오전 9시 무렵이다. 이튿날 기사는 9시경이라 했고, 2일 뒤 기사는 9시 20분이라 했다. 또 평북도지사의 보고는 9시 5분경이라 했다. 공격은 5분간 이뤄졌다. 몇 시간 동안 교전했다는 언급도 있지만 발사 수를 고려하면 5분 정도가 맞다. 20일자 기사는 30~40발 사격했고 곧 일경이 70여 발을 대응 사격했다 적었다. 21일자 기사는 40~50발을 발사했고 일경이 약 80여 발을 대응 했다고 하였다. 평북도지사의 보고는 "장총 또는 모젤 권총으로서 약 40~50발 발사한 것으로 파악되고…기총(騎銃) 28발, 모젤 권총 44발, 모두 72발을 응사했다"라고 적었다. 8명이 각 5발 정도를 조준 사격했다고 보면 전투시간은 5분 정도가 된다 하겠다.
총독을 쓰러뜨리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총독 일행이 두 척의 배에 나눠 탔기 때문이다. 곧 사이토는 웅비호(雄飛丸. 10톤 규모)라는 민간 여객선을 탔고, 그 앞을 평북 경찰부원과 수행원이 탄 비창환(飛昌丸)이 인도했다. 비창환은 웅비환의 경비 역할을 했다. 무장 일경을 확인하자 독립군은 앞배에 총독이 탄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공격했다. 하지만 총독은 뒷배에 있었다.
1923년 말에 기관총을 장착한 일본 군함을 경비선으로 배치할 계획이었지만 결빙으로 미뤄졌다. 1924년 5월에는 무장 경비선을 배치하고 그에 탑승하거나 호위를 받아 국경을 시찰할 수 있었지만 사이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선 두 척이 압록강에 배치된 것은 5월 말로 사이토의 국경 시찰 직후이다. 사이토는 국경 경비가 완벽하고. 독립군의 진입 작전도 없이 평온하다는 것을 민간 여객선을 타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이토의 의도는 참의부 부대의 공격으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왜적과의 독립전쟁이 힘차게 이어지고 있음을 총독을 향한 저격이 증명했다. 오기영 기자의 표현으로, 식민권력의 수괴 총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후 사이토는 물론이고 후임 총독들도 다시는 압록강 순시를 시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