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만주상세지도 어랑촌 부분어랑촌(마록구) 고지에 매복한 북로군정서는 낮은 곳에서 전진해오는 일본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텍사스대학교
백운평전투와 마록구전투에서 전사자가 많다. 마록구에서는 주력부대가 퇴각할 동안 1개 소대가 좁을 길을 지키고 일본군의 추격을 막다가 모두 영웅적으로 전사했다(이범석, <우둥불>). 여러 전투의 전사자와 이를 종합한 전사자의 수가 대체로 일치하므로 이 회고 내용은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전사자는 거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북로군정서 종군장교 강화린은 해방 후 "무명용사와 경신참변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비석이나마 세워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김재승,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 그는 "청산리전투는 우리들만이 한 전투가 아니다"고 했다. 북로군정서뿐 아니라 좁게는 전투에 참가한 홍범도연합부대, 넓게는 아낌없이 독립군을 지원했던 전투 지역의 동포들, 나아가 경신참변으로 희생된 동포들 모두가 전투의 주역이라는 인식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주력부대의 퇴각을 위해 남아 적을 막고 전멸을 택했던 북로군정서 소대원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연합부대의 전사 통계는 없다. 홍범도의 회고(<홍범도의 일지>)에 따르면 청산리 길목 어구의 전투에서 3명이 "굶고 얼어 죽었다." 또 안도현으로 가는 길에 숙영했는데, 적의 기습을 받아 불을 쬐던 군인이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이종학(홍범도부대원)은 이 때 6명이 전사했다고 회고(<홍범도 군대 독립군>)했다. 그밖에 전사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없는데, 실제 전사자가 극소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교전하며 전술적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하는 과정에서 독립군 전사에 대한 온전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홍범도연합부대는 500명 정도가 참전했다.(주4) 전투 후 안도현에 도착했을 때는 그보다 많이 적었다. 그 차이를 모두 전사로 할 수는 없다. 연합했던 다른 부대들과 전술적으로 분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전사자도 있다 하겠다.
봉오동전투도 전투 직후 <독립신문> 발표로는 4명의 전사자가 있다 했는데, 다른 기록으로 보아 최소 11명의 전사가 확인된다. 일본군은 30명 안팎으로 발표하기도 했지만, 기록을 검토하면 과장으로 판단된다. 당시 국민회 발표와 회고(<홍범도 군대 독립군>) 등으로 보아 최소 11명의 전사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한국독립군의 전투 : 만주사변 후 한국독립군의 전사 통계도 밝혀지지 않았다. 조경한의 회고(<백강회고록>)에 따르면 쌍성전투 때도 전사는 많지 않았다. 항일중국군과 연합해 두 차례에 걸쳐 쌍성을 공격해서 점령했는데 비행기 공습을 앞세운 일만군이 반공했다. 군수품 손실이 컸지만 인명 피해는 적었다. 기록상 중국인의 회고에 쌍성전투 때 3명의 희생이 확인된다. 중상을 입고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독립군 3명을 중국인이 숨기고 보호해주었는데 일본군의 수색으로 발각되어 모두 학살되었다.(주5) 그 외에도 쌍성전투에서 어느 정도 희생이 있었다 하겠다.
한국독립군은 구국군과 연합해 치른 동녕현전투 때 전사가 가장 많았다. 현성을 공격, 점령하는 과정에서 강진해 등 수십 명이 전사했다(조경한, <백강회고록>). 동녕현성은 만주국군도 있었지만 주력부대는 일본군으로 대포와 장갑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국독립군과 구국군은 일본군 주력부대가 수비하는 서문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희생이 컸다.
임시정부 요청으로 한국독립군 지휘부는 관내로 이동하고 잔류부대는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만주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최악·안태진부대인데 안태진은 행군중 적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안태진과 함께 사병들의 희생도 있었다 하겠다.
그밖에 큰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의 전사 순국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일본군 간도임시파견대를 공격한 대전자령전투에서도 경상자가 4-5인 정도였다(조경한, <백강회고록>). 유리한 곳에 매복해서 공격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군은 신속한 전술적 행군을 바탕으로 방어전을 피하고 공격전을 중심으로 했다. 넓은 지역을 이동하며 공격 후 적의 포위에 들지 않고 빨리 퇴각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다.
▲조선혁명군의 전투 : 만주사변 후 조선혁명군의 전사는 계기화의 회고(주6)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의 회고는 조선혁명군 전투 기록이면서 아울러 전사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혁명군 정규의용군은 초기 전투에서 큰 피해가 없었다. 다만 재향에서 신규 모집한 부대는 전사가 많았다.
계기화에 따르면 2개 중대의 병력을 새로 모집해 중국군과 함께 무순(撫順) 공격에 나섰는데 1개 중대는 42명이 전사하고 81명이 생존했으며, 1개 중대는 74명이 전사하고 69명이 생존했다. 무장을 갖추었던 조선혁명군 주력과 달리 새로 모집한 부대는 비무장 상태로 전선에 투입되어 많이 희생되었다. 생존자는 결국 무장 의용군으로 편제되지 못하고 귀향했다. 이들은 조선혁명군 정규부대는 아니었지만 편제된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계기화는 이들은 '전사'로 기록했다. 초기 전투에서 116명의 전사자였다.
길림자위군과 연합해 일만군과 싸운 조선혁명군 주력부대는 초기 작전에 성공하고 통화현에서 퇴각 작전을 펼쳤다. 도강 과정의 교전에서 2명의 첫 전사가 나왔다. 중상자 2명은 안락사(지금 시대의 안락사와는 다른 개념 - 편집자 주)했다. 이어 사첨자에서 적과 교전하여 7명이 전사 순국하고 3명이 안락사로 순국했다. 행군 시작 3일 만에 3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산악 지대에 근거지로 구축하고 고산준령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항일전을 전개했다. 타곡산에서 중국군 왕봉각부대와 연합해 활동했는데 일만군과의 교전에서 17명이 전사하고 중상자 4명이 이동 중 사망해서 모두 21명이 전사 순국했다. 1933년 음력 7월 현재 상황을 보면, 100여 명의 '인원 손실'이 있었는데 전사 외에 병사나 동사도 포함된다. 이후 1934년 정월(음력)까지 40여 명이 또 희생되었다. 초기 전투부터 1934년 초까지 모두 140여 명이 순국했다.
이어 관전현 하루하에서 일만군 3000-4000명의 포위를 뚫으려고 조선혁명군 300여 명이 결사적으로 전투해서 120-130명이 전사했다. 조화선 중대는 탈출로를 뚫으려고 적과 육박전을 하면서 모두 전사했다 한다. 계기화는 하루하전투가 독립군이 치룬 남만주 최후의 큰 전투였다고 말했다.
계기화는 1935년 8월(음력)까지 조선혁명군과 연계를 지녔는데 하루하전투 이후의 전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회고로 보면 하루하전투까지 모두 260-70명이 희생되었는데 그 가운데 150-180명을 확실한 전사로 기록했다. 그 외에 부상당한 뒤의 사망과 병사 등도 포함되었다. 이들도 연이은 전투 속에서 순국했다. 여기에 주력 부대로 편제되지 못한 비무장 중대 116명의 전사까지 포함하면 370-380명 정도가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하루하전투 이후의 전사 등을 고려하면 전사 순국은 더 많다.
계기화의 회고는 '구체적으로' 독립군 희생의 숫자를 밝힌 유일한 기록이다. 이 회고는 비록 전사자 이름은 전혀 없지만, 전사 상황 일지(日誌)라 할 정도로 보기 드문 기록이다. 하지만 회고가 정확한지 의문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의 회고는 연도가 잘못 기록된 경우가 있다. 또 조화선 중대가 전멸했다고 했는데, 실제 조화선 중대장은 생존해서 항일연군에 참가했고 1938년에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전멸했다는 조화선 중대도 전사한 것이 아니라 주력 부대에서 분리되어 이후 따로 활동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계기화의 회고에 나타난 전사 통계가 전적으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 숫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만주사변 이후 조선혁명군 수백 명이 전사 순국한 것은 사실이다. 전사자 대부분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독립군 전사들
이상으로 볼 때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 등 일본군 단독부대와 싸울 때는 오히려 전사가 많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소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과 만주에서의 일만군, 일경과의 교전에서는 전사가 많았다. 국내 진입 작전은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희생이 많았다.
또 만주사변 후 주로 일만군 혼성부대와 싸웠던 조선혁명군의 전사도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한국독립군도 수십 명의 전사가 있었다. 공성·수성 전투, 기습공격 전투를 치른 한국독립군은 전투 규모가 비교적 컸는데 전사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공세적 전술 때문이었다. 곧 일만군의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에 이동하여 전략적 요지를 선점하고 이동하는 일본군, 또는 일만군을 공격하거나 한중연합군의 군사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현성을 공격함으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조선혁명군은 상대적으로 빨리 일만군이 장악한 남만주에 근거했고 먼 거리로 군사적 이동을 하지 않았다. 산악지대를 근거지 삼아서 일만군의 포위에 대항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포위망을 구축한 일만군의 대공격에 때로 공격 전술을 택했지만 결국 방어 전술에 중심을 둘 수밖에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조선혁명군은 전사가 많았다. 3000-4000명의 포위 속에서 격전을 치르다 120~130명이 전사한 하루하 전투가 대표적이다.
앞서 대략적으로 전사 통계를 보았지만 여러 전사의 정황이 실제 전사자를 포괄한다 할 수 없다. 해방 직후 '독립군 전사 조사위원회'를 조직해서 조사했다면 개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었겠지만, 반민특위도 강제로 해산되는 때라서, 전사 통계의 실제를 알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독립운동사 연구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위 통계들은 후일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부분에 한정되었고, 기록에 남지 않은 독립군의 전투와 전사(戰死), 그리고 전사의 주변과 관련된 희생은 지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위에서 본 통계들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숫자가 독립전쟁의 실제를 알려준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숫자마저 온전히 파악되지 않고 부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름을 남기지 못한 무수한 독립군 전사(戰士)의 전사(戰死)는, 독립군 탄생 100년이 지난 지금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군과의 전투, 국내 진입 작전과 만주 작전에서 일경과의 전투, 만주사변 후 일만군과의 전투 등 어떤 전투건 독립군은 자신의 위치에서 적과 싸우며 결사항전을 했다. 전사는 총으로 독립을 외치다 순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빛나는 죽음을 택했으며 살아남은 독립군은 그들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고 그들과 하나가 됨을 다짐했다. 항일전쟁의 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웅적 전사와 희생(병사, 옥사)이 있었다.
(주)
1)오기영, <압록강상이천리>, <동아일보> 1929년 8월 23일. 기사는 일제 경무국 통계를 바탕으로 했다 하겠다.
2)<自大正九年至昭和八年間國境匪賊累年狀況表>,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昭和8年>>, 巖南堂書店, 1966, 233쪽.
3)오기영, 위의 글.
4)1500명 정도로 파악한 일제 문서도 있지만, 전후 내용을 검토해보면 사실과 다르다. 홍범도는 520명으로 회고했고, 500명 정도로 파악한 일제 문서도 있다.
5)徐明勛, <獨立軍名將李靑天>, <<哈爾濱市朝鮮族百年史話>>, 黑龍江人民出版社, 2008, 66-67쪽.
6)계기화, <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7, 17-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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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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