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감옥 9옥사(지금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독립군을 포함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고 옥중 투쟁도 전개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등 간부 11명은 회의 중에 일경 30여 명과 중국경찰 100여 명의 습격을 받고 피체됐다. 신민부 무장대오인 보안대는 다른 곳에 출장 중이었고 함께 있던 간부들은 비무장이었다. 앞서 체포됐던 신민부원를 통해 신민부 근거지 상황이 드러났고 일경은 기회를 엿보다가 신민부 무장대의 경호가 없을 때 공격했다. 간부들은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결국 피체됐다(<동아일보> 1928.3.22. 이하 출처 인용에선 날짜만 적는다).
백서농장 장주,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역임한 김동삼은 1931년 10월 하얼빈 동지 집에 머물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게 피체됐다. 비무장 상태였다. 김동삼은 피체된 날부터 단식했다. 일경의 취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옥중투쟁에 들어갔다. 정의부 군사위원장이던 오동진도 밀정의 밀고에 비무장상태로 일경에게 피체됐다.
참의부 1중대 소대장 김창균은 1926년 위원군에 진입하다 일경에게 피체됐다. 그는 1924년 참의부의 사이토(齋藤) 총독 공격작전에 참전했으며, 화창면 일경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피체될 당시에 농민으로 변장하고 고향의 형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잡힐 때 일경이 참의부 군인임을 몰랐는데, 근처의 참의부 변절자 최치삼(崔致三)이 알려주어 피체됐다(1926.9.7.).
군정서에 가담했던 선규환은 1922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피체됐다. 1927년 출감한 뒤에 다시 군자금을 모집하러 평양에 잠입했다가 또 피체된다. 의용군은 아니고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국내에서 독립군을 지원하는 조직 활동을 했다(1928.4.23.; '판결 대정 11년 형상 제139호').
군비단 간부 이승(이민환, 일명 이홍파)은 군자금을 모집하고 지단을 조직하기 위해 국내에 진입했다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됐다.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이승은 군비단 무장대원이 아니고, 군사 활동을 지원하는 간부였다.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위에서 보았듯 피체된 독립군은 주로 비무장 상태이거나 비전투요원이었다. 중국 군경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피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붙잡힌 독립군들은 주로 비무장 상태였다
지휘관이건 일반 병사건 피체는 무장대오의 중대한 손실이고 특히 대규모로 피체될 때 타격이 컸다.
이를테면 1932년 1월 19일 조선혁명당·군 간부회의 때 일경과 중국보안대가 습격해서 이호원·김보안·김관웅·이종건·박치화·이규성·장세용·차용륙·전운학·이동산·서세명 등 지휘관이 피체됐다. 조선혁명군 항일전에 큰 충격을 준 이른바 신빈 사건이다. "만주 독립운동사상 심장을 잘린 치명타를 입었다"는 회고(계기화, <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가 있을 정도였다. 그 뒤 양세봉, 고이허 등 노력으로 대오를 정비해 항전을 지속했지만 신빈 사건은 항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중요한 지휘관 회의가 어떻게 일제 주구에게 노출됐으며 왜 무장경호대는 없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습격에 대한 방어 전투, 또는 전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무장 경호대가 없고 지휘관들도 비무장이었던 탓이다. 회의 장소를 밀정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 무장 경호 없이 회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장세용, 박치화, 김보안, 전운학은 감옥에서 순국했고 이호원, 이규성, 차용륙은 살아서 출옥했지만 다시 항일전에 나서지 못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조선혁명군 항전은 더 강화됐을 것이다.
피체된 동지를 구출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1929년에 중국 관헌이 조선혁명군 4명을 체포하여 일경에게 넘겼다. 정보를 파악한 조선혁명군은 호송대열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매복 공격하여 동지를 구출했다(1929.10.2.).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이 피체되자 장기선 등 부하가 세 차례에 걸쳐 구출 활동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천마산대는 희천군 창참주재소를 공격해서 천마산대 군인 임성률을 구출하고 일경을 사살했다(1924.6.9.).
독립군들, 일본 경찰의 고문을 이겨내다
독립군은 피체되면 곧 새로운 전투를 시작했다. 몸은 자유롭지 못하고 무기도 없지만 말과 행동으로 항전을 지속했다. 피체는 전투의 끝이 아니라 새 전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김동삼은 피체와 동시에 단식을 시작해 며칠 동안 지속했다. 취조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고문이 계속됐다. 1931년 10월 22일 기사에는 '원기가 왕성'하다고 했는데 불과 사흘 뒤의 기사(1931.10.25.)에는 '신음 중에 있다'고 했다. 사흘 동안의 고문에도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혹한 고문에도 취조에 응하지 않는 투쟁이었다. 김동삼을 체포해서 가혹하게 고문한 주구는 하얼빈 고등계 형사 양영환(梁永煥)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1949.4.2.).
단식은 옥중 투쟁의 시작이었다. 허로(許鷺. 주2)는 1922년에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피체됐다. 일경의 취조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백이숙제의 고사를 들어 "회복하려던 사직도 회복치 못하였으며 오늘날 너희에게 잡혔은즉 어찌 너희가 주는 음식을 먹으랴"고 외치고 단식하였다. 결국 동대문경찰서는 허로를 본적지인 대구로 보냈다(1922.8.8.). 단식투쟁의 승리였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 특파원 안해용은 입대할 청년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가 일경에 피체됐다. 그는 압송 도중에 성주 읍내, 칠곡군 왜관 도선장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판결 대정 12년 형공 제12호'). 국내 동포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쳐 항전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렸다.
신문·취조 과정에서는 잔혹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군비단 이승의 경우, 밤에 자고 있는 이승을 끌어내어 일경 4명이 몽둥이로 난타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4명이 더 가세하여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 이튿날 잠시 깨었다가 다시 혼절해서 6일 뒤에나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그는 눈을 뜨지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대한독립단 이정서는 옥상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일경에게 중상을 입혔다. 동지들과 함께 피체됐다. 곤봉으로 난타당하고 거꾸로 매달려 입과 코에 물과 술을 부어넣는 고문을 당해 4-5차례나 기절했다. 4-5일을 견디다가 잔혹한 고문 때문에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판결 대정 10년 형상 제88~91호'). 그는 추후 사형당해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