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그린미술관 이상옥할머니 초대전 '동물의 왕국' 대담못그린미술관 김영수 관장이 이상옥 할머니 초대전 잔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앉은 분이 이상옥 할머니.
변택주
"벌로 그렸어요."
"……?"
지난 7월 30일 부천 중동시장 어귀에 있는 서로 살림공동체 모지리 못그린미술관에서 화가 이상옥 할머니(84)가 한 말씀이다.
7월 22일에서 8월 14일까지 열리는 '동물의 왕국' 전시회에서 모지리 마을 사람들과 초대화가 이상옥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못그린미술관 김영수 관장이 벽에 붙은 나비 그림을 가리키며 '뭘 보고 그리셨느냐'고 묻자 나온 답이다.
"아니, 할머니. 뭘 보고 그리셨느냐고요?"
"벌로 그렸다니까…."
"뭘 잘못해서 벌 받으셨어요?"
"아니, 벌로 그렸다고."
무슨 말씀일까? '벌로'는 '그냥'이나 '대충'이라는 말씀이다. 뭘 보고 그리거나 애써 무얼 그리겠다며 그린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대로 그냥 그렸다는 말씀이다.
달력 뒷장에 '대충' 그리던 그림이 바꾼 삶
버려지는 상자를 주워 손주들에게 줄 용돈 벌이를 하던 이상옥 할머니는 지난 2019년 7월 이곳 못그린미술관에서 달력 뒷장에 그린 그림을 전시하면서 화가로 데뷔했다.
1937년에 태어나 한반도 전쟁에서 어버이를 여읜 이상옥 할머니. 그는 전쟁통에 만난 사람과 혼인해서 팔 남매를 낳아 길렀고, 해보지 않은 장사가 없을 만큼 힘껏 살았다. 오래도록 몸에 밴 부지런함이 여든이 넘은 할머니를 그냥 두지 않았다. 버려진 빈 병이나 상자를 틈틈이 주워다 팔아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면서 숲도 살렸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웠던 자식들은 이상옥 할머니에게 할머니·할아버지가 다니는 유치원 '데이케어센터'에 다니라고 말씀드렸다. 이 말씀을 요양원에 가라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이상옥 할머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 앞에서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내며 대성통곡을 한다.
"요양원에 가라고 해서 성질이 나서 '절대 그런데 안 가!' 내 힘껏 팔 남매를 키우며 살아왔는데 내가 왜 낯선 사람들하고 섞여 살아야 해? 싫어! 난 여기서 살 거야. 친구도 만나고 손주도 보고…"
바다로 나아가기를 뿌리치고 우물 안 개구리를 고집한 할머니는 손주가 놔두고 간 색연필을 가지고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렸다. 이걸 본 둘째 딸이 아이들 색칠 공책을 사다 드렸다. 곱게 색칠한 그림은 왼쪽에 있고, 왼쪽 그림과 똑같은데 금만 그어져 있는 오른쪽 그림에다 왼쪽 그림과 같은 빛깔을 칠해 넣어야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색칠 공책에 있는 그림을 달력에 옮겨 그린 다음에 공책에 있는 빛깔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 마음대로 빛깔을 입혔다. 이 우물 안 개구리는 청개구리였던 것이다. 뜨끔했다. 틀을 벗어난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