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무부의 헌병대 설치를 전하는 일제 문서만주 군무부(황병길부대)는 군율 단속과 군사정보 탐색을 위해 헌병대를 설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군은 특히 작전 정보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노력했다. 군무부(황병길부대)는 부대 주둔 때 전체 병력이 모여 있으면 적의 정보망에 노출되기 쉽다고 판단하고 여러 부대로 나누어 분산 주둔케 했다. 국내에 진입해 작전할 때는 행선지를 군무부장과 '출장'가는 부대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했다('조특보 제32호').
왜적의 경계가 강화될수록 보안도 더 강화되었다. 정의부는 국내 작전 부대를 몇 조로 나누어 진입케 한 뒤에 한곳에서 만나 작전하도록 했다. 한 조는 다른 조의 진입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지정된 곳에 가서야 만나 함께 작전할 수 있었다. 이를 총괄하는 것은 사령부였다. 작전 중 한 조가 일제 감시망에 걸려 혹여 피체되더라도 다른 조는 계획에 따라 진입해서 작전했다. 피체된 조가 고문당하더라도 다른 조의 진입을 모르므로 그 정보를 누설하지 않을 수 있게 한 것이다.(주1)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왜적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따라서 독립군은 여러 형태로 왜적 정보를 확보하려 했다. 이를테면 정의부는 작전부대가 통과할 지역의 통신원에게 연락해서 왜적 감시대의 상황을 점검토록 하고 안전이 확보된 뒤에 그 지역을 통과해서 작전을 수행했다.(주2) 곧 지역 통신원이 왜적 감시망의 역할을 했다. 군무부는 국내 경찰의 자세한 배치표를 지니고 있었다. 독립진영에 우호적인 지역 관리나 독립진영으로 귀순한 일경이 제공한 정보였는데('조특보 제32호') 군무부는 이를 이용해서 경계망을 피해 국내 작전을 수행했다.
청산리전투 후 노령으로 북정한 부대들이 통합하여 편제된 대한독립군(총재 대리 김혁)은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출신을 군사탐사원(軍事探査員)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독립진영의 연락을 담당하고 만주 동포사회의 동향을 파악하며, 나아가 '일본 관헌과 밀정의 동정을 정찰'하는 것이 임무였다('기밀제367호'). 항일 역량의 강화를 위해 정보 수집과 밀정 정찰을 임무로 하는 기간요원이 활동했던 것이다.
항일전투에서 군사보안은 매우 중요했다. 독립군의 작전 성공을 위해서 밀정의 접근은 차단하고 역으로 일경 등 왜적의 동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확보해야 했다. 남북만주 각 독립군단은 모두 제도적으로 밀정을 색출하는 경로를 가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밀정이 독립진영에 잠입하여 정보가 일제에게 노출되기도 했는데 이는 보안 대처가 완벽하지 못했다는 한계이면서, 아울러 남북만주에서 거세가 고조된 독립전쟁 열기에 일제가 경악하며 이를 탐지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밀정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전투 후 군사 작전에서의 보안은 더욱 철저했으며 부대를 분산해 다른 부대 존재를 모른 채 국내로 진입하는 등의 형태로 작전을 수행했다. 또 독립군은 작전 성공을 위해 통신원, 군사탐사원, 전향한 일경 등을 통해 작전 대상에 대한 정보를 확보했다. 수많은 독립군 작전의 바탕에는 작전대상인 왜적에 대한 정보 확보가 있었다.
밀정 토벌
독립진영의 동포들은 밀정을 창귀(倀鬼: 먹을 것 있는 곳으로 범을 이끄는 못된 귀신), 금수(禽獸: 짐승), 응견(鷹犬: 사냥매·사냥개), 정견(偵犬: 정탐개), 주구(走狗) 등으로 불렀다. 못된 귀신과 짐승, 특히 개라 한 것이다. 하지만 짐승도, 특히 개는 주인을 따르고 배신하지 않는데 이들은 돈 때문에 나라와 겨레를 배반했으므로 '돈 받아먹고 친일파 노릇하는 짐승보다 못한 자'라고 했다.(주3)
앞서 보았듯이 독립군 지도자들이 밀정의 밀고로 희생되고 항일작전도 어려움에 처했는데, 그뿐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독립군 사병과 비무장 독립지사들도 밀정 때문에 많이 희생됐다. 왜적과 전투하다 전사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군인으로서 두렵지 않고 아쉬울 것도 없지만, 밀정 때문에 덧없이 희생되는 것은 통탄할 일이었다. 주구 밀정이 수많은 독립지사를 밀고해 희생시켰다. 만주에 밀정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독립지사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밀정에게 희생되었다 하겠다. <독립신문>(1923.3.14)은 그 실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의인열사(義人烈士)가 피배(彼輩)의 독아(毒牙)의(에) 리(罹)하야 신명(身命)을 허(虛)ㅅ되히 빼앗기며 기밀 대사가 피배의 화안(禍眼)에 촉(觸)하야 와해(瓦解)에 귀(歸)하는 사(事) 역기수난계(亦其數難計)라 적(賊)의 정탐과 적의 관리는 왜적보다도 기죄(其罪)가 중[하다.]"
열사들이 밀정의 독이빨에 물려 목숨을 헛되이 빼앗기고 독립진영의 중요 기밀이 밀정의 못된 눈에 걸려 실패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그 죄가 왜적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밀정은 만주 일반 동포들도 많이 희생시켰다. 만주에 정해붕이란 밀정이 있었다. 무고한 농민도 밀고해서 고생하게 만들던 자인데, 그의 밀고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숱했다.(주4) 만주 밀정조직인 보민회의 최정규는 "농사짓는 양민을 독립단이라 하야 몇 천 명 동포를 살해케 하고 무죄 양민을 못살게 했다."(<동아일보> 1925.9.4.)
밀정은, 따라서 왜적처럼 토벌의 대상이었다. <독립신문>(1920.2.5)에 실린 유명한 '칠가살(七可殺)'은 금수 같이 국가에 큰 해를 끼치는 흉악한 자를 적으로 규정하며 사형시킬 '전시(戰時)의 적'으로 7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밀정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가 적의 수괴, 불령일인(不逞日人)·헌병관헌(憲兵警官) 등 왜적이고 두 번째가 이완용 등의 매국적(賣國賊)이고 그 다음이 창귀, 곧 밀정이다.
창귀를 가살
혹은 고등 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아(我)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아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醜類)들이니 선우갑(鮮于甲), 김태석(金泰錫), 김극일(金極一)과 같은 흉적(兇賊)이라. 특히 중요한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중요한 인사를 체포한 자에게는 반드시 즉시 복수를 하여야 할지니 이는 동지에게 대한 의무일 뿐더러 차등 적류를 징계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라, 여차한 죄악을 범한 악한은 천애지각(天涯地角) 어디로 가더라도 사(死)의 저주를 도피치 못하도록 함이 애국자의 의무니라.
대한독립단의 「토벌령」도 네 종류의 토벌 대상을 열거하며 왜적의 앞잡이가 된 관헌 다음으로 '왜적의 응견이 되어 정탐으로 종사한 자'를 토벌한다고 선언했다.
토벌은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선 밀정의 이름과 해악이 발견되면 독립군의 '공판에 회부'했다. 이를테면 <독립신문>(1923.3.14)은 만주의 보민회 등 일제 주구조직의 해악을 지적하며 "밀정 겸 난도(亂徒)의 괴수 이완구(李完求), 유기선(劉琪璇), 이봉춘(李奉春), 강달주(姜達周), 강익주(姜益周), 김이구(金利狗) 등을 먼저 아 독립군의 공판에 (붙인다)" 공언했다. 밀정이라고 바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고 우선 독립군단에서 처단 여부를 공적으로 판단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또 독립군단에서는 밀정에게 죄를 뉘우치고 옳은 길로 돌아설 기회를 주었다. 대한독립단은 토벌 대상에게 '토벌령', '선고장' 등을 보내 정한 날자(3일 또는 10일) 안에 직을 그만두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는 용서한다고 밝혔다(<대한독립단 토벌령>). 대한독립군은 「특고(特告) 순사보조원(기타 밀정 공람)」을 발표해서 밀정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다고 밝혔다.
곧 왜적의 순사보조원·밀정에게 동족을 살해하고 왜족에게 충성하는 천인공노의 죄를 일깨우고 정의와 인도를 따르도록 촉구하면서 증표가 확실하면 독립군에 편입하도록 허락한다고 하였다('수밀 제102호 기976'). 실제 어릴 때 독립단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 차경수는, 독립단이 정탐(밀정)을 잡아 우선 설득시켜 그가 회개하면 독립단으로 귀순시키고 아니면 처단했다고 회고(<호박꽃 나라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