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강렬의성단 단장으로 만주의 일제 기관을 공격하는 등 활동을 했다. 밀정 승정윤(승학산)의 밀고로 피체되어 1929년 순국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도록 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밀정은 거액의 일시불을 받았다. 예컨대 의성단 단원으로 일경에 체포됐다가 밀정이 된 승학산(承鶴山: 본명 承禎允)은 일경이 의성단 단장 편강렬을 체포하도록 돕고 1만 원을 받았다(<중외일보> 1927.8.5.).
전 의군단 군인 황용운(黃龍雲)을 일경에게 밀고해 체포하도록 도운 밀정은 120원을 받았다(<독립신문> 1923.2.7; 5.2., 주1). 독립군 지휘관과 일반 사병에 따라 밀정이 받는 돈에 차이가 있는데 돈을 노린 밀정의 밀고는 무차별하게 이뤄졌다. 월급을 받는 거물 밀정이든, 밀정 조직인 보민회 밀정이든, 현상금을 노린 사건 계획 밀정이건 만주는 돈으로 양성된 '밀정 세상'이었다. 일제 외무성과 조선총독부에서 만주 경비로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데 교육·의료기관 비용 외에는 대부분이 '밀정 양성이나 직업적 친일 표방자'에게 흘러들어갔다(<동아일보> 1923.5.31.).
현상금을 노린 밀정에게 희생된 독립군 지도자는 적지 않았다. 국경 지역의 신의주에 '밀정이 제일 많다'는 풍설이 있었는데 '경찰 밀정, 세관 밀정, 전매국 밀정'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들 밀정은 '무엇이든지 하나만 발각을 시키면 큰 수가 난다'고 하며 밀정 활동을 했다. 세관 밀정이 밀수입을 발각하면 압수 물품의 반을 받았다(<개벽> 제38호). '경찰 밀정'도 독립군 정보를 밀고해서 체포케 하면 일경이 거액의 돈을 줬다.
밀정 가운데는 돈을 받고 거짓 정보를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돈 받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적당히 지어낸 정보를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사실과 다른 풍설(風說)을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일제 정보망을 교란시키려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일제 군경 정보문서 가운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밀정도 편차가 있었다. 이를테면 <독립신문>(1919.11.11.)에 따르면 1919년 하반기에 국경지대의 일경이 다수의 밀정을 만주로 월경시켜 정보를 탐문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돈을 받고 시일을 보낸 다음 국내로 돌아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보고하거나, 경우에 따라 일제 정보를 독립군에게 몰래 알려주기도 했다. 3.1혁명과 청산리전투, 경신참변의 영향으로 밀정이 독립진영으로 전향하거나 적어도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중 밀정'도 있었다. 신명규(申明珪)는 봉천 영사관 고등계 형사의 밀정이었는데 독립단에게도 돈을 받고 일제 경찰 정보를 제공했다. 대한통의부 5중대원 박희광 등은 신명규가 제공한 정보로 악명 높은 보민회 회장 최정규(崔晶圭)를 처단하려 했다. 신명규는 사실이 드러나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동아일보> 1924.10.5.). 보민회는 '조선독립군을 토벌한다고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받아 가지고 조직'됐다(<동아일보> 1925.1.15.). 회원이 독립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밀고를 하는 밀정 조직이다. 당연히 독립군의 토벌 대상이었다. 독립군은 이중 밀정을 이용해서 보민회 회장의 집 위치 정보를 받아서 공격하려 했다. 밀정을 역이용한 정보전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보민회원이 독립군 진영에 귀순하기도 했다. 통화현 보민회지부장 이동성(李東成)은 일제 영사분관의 끄나풀이 되어 독립군 활동을 방해했다. 따라서 통화현 의용군 소대장이 그를 체포하려 했는데 그는 도망갔고, 그의 아들이 대신 체포됐다. 이동성은 일경과 함께 독립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며 독립군에 귀순했다(<동아일보> 1923.5.5.). 그는 그나마 남은 양심이 되살아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런 경우 역시 드물었다. 대부분의 밀정은 '같은 민족이면서 돈 받고 그런 양심 없는 짓'(주2)을 계속 했다.
독립군 활동을 파괴한 밀정
독립운동의 중요 현장에서 밀정이 개입해 운동을 좌절시키고 또 많은 독립군 지도자를 희생케 했다. 먼저 '간도 15만 원 사건'. 조선은행에서 일본돈 15만 원을 만주로 운반했는데 최봉설, 임국정 등은 그것을 빼앗아서 무기를 구입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
한때 안중근 의사의 의형제였다가 일제 밀정이 된 엄인섭(嚴仁燮)은 이 사실을 알고 일제 영사관에 밀고했다. 대가는 1만 원이었다. 임국정 등은 일본 헌병대에게 붙잡혀 순국했다. 상해임시정부가 만주의 사관학교 1년 예산으로 1만 원을 계획했으므로 15만 원이면 만주·노령의 독립군 무장대오가 훨씬 강화됐을 것이다. 밀정 엄인섭이 그것을 좌절시킨 것이다. 엄인섭은 일본말을 몰라 그 뒤에 밀정에서 쫓겨났다. 만주 동포들에게 밀정이라는 욕을 듣다가 '왜놈 정탐배'로 죽는 것을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최계립, <간도 십오만원 사건에 대한 사십주년을 맞으면서>).
편강렬은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의 선봉장이었고 1910년 105인 사건 때 피체돼 3년 옥살이를 했다. 이후 1923년 만주에서 의성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했는데 밀정 승학산의 밀고로 피체돼 순국했다. 독립진영에 있던 승학산은 1920년 '제령(制令)위반'으로 복역하다 출감한 후 밀정이 됐다.
의성단에 잠입해서 비밀을 탐지했다. 1925년에 편강렬을 하얼빈 양복점으로 유인해 일경이 체포케 했다. 편강렬은 옥중에서 발병해 보석됐으나 순국했다. 밀정 승학산은 그 대가로 1만 원을 받아 2년 만에 다 쓰고 이후 독립군 행세를 하며 부호에게 돈을 뜯어내려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중외일보> 1927.8.5.).
오동진은 광복군총영 총영장(總營長), 통의부와 정의부의 의용군 사령장이던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였다. 그의 부하가 밀정이 돼 일경에게 밀고해서 피체됐다. 김종원(金宗源)은 정통단(正統團) 사건에 관련해서 체포됐는데 평북 경찰 고등계주임 김덕기(金悳基)가 그를 밀정으로 포섭했다. 오동진은 그 사실을 모르고 김종원을 믿었다.
김종원은 오동진의 집에 자주 다니면서 신임을 얻은 뒤에 일경의 지시대로 장춘으로 오동진을 유인해서 일경이 체포하게 했다. 당시 독립운동자금이 절실했는데 금광 부호 최창학이 몇만 원을 가지고 지원하러 온다는 거짓말로 오동진을 장춘으로 유인한 것이다(<동아일보> 1928.2.11.일-13). 오동진은 옥중에서 순국했고 김종원의 그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양세봉은 정의부 중대장이었고 만주사변 후 조선혁명군 사령장으로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전을 지휘했다. 일제는 양세봉을 체포하려고 그와 알고 있던 밀정 박창해(朴昌海, 주3)를 이용했다. 박창해는 항일을 위한 군사합작문제로 중국무장단을 찾아가야 한다고 양세봉을 유인했다. 그곳에는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양세봉은 투항을 거부하고 권총을 뽑아 싸우다가 전사 순국했다. 독립군은 1년 반을 추적한 끝에 박창해를 처단했다.
독립군 지도자들이 밀정의 공작으로 순국한 몇 예를 봤는데, 이로 보더라도 밀정이 항일전의 역량을 얼마나 약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밀정은 독립군의 대규모 희생을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참의부의 고마령참변(古馬嶺慘變)이 있다. 참의부는 1924년에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총독을 공격하는 등 국내 진입 작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25년 중국 집안현 고마령에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일경이 불시에 습격해 2중대장 최석순과 여러 간부, 수십여 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그 회의를 밀고한 것이 밀정이었다. 홍재을(洪載乙)이란 설도 있고 참의부 다른 중대장의 밀고였다는 설도 있다. 중요한 회의 장소가 일경에게 노출되어 습격당한 것은 밀정의 밀고 때문임이 확실하다. 습격 때 앞장서 안내한 것도 밀정 이죽파(李竹坡)였다.
참의부 1소대장 장창헌도 밀정 홍인화(洪仁化)에게 희생됐다. 홍인화는 참의부 일을 도와주며 신임을 얻은 후에 내부 동향을 일경에게 보고하다가 급기야 장창헌이 강계면으로 진입해서 작전을 펼칠 때 유인하여 일경이 총살케 했다. 또 소대원이 주둔한 근거지게 가서 소대장이 위급하다고 거짓으로 유인해 매복하고 있던 일경이 공격하게 했다. 장창헌 등 3인의 독립군이 희생됐고 소대 근거지도 일경에게 파괴됐다. 이 소식을 들은 손용준(孫用俊) 등 농민 3명이 밀정의 악행에 분노해 홍인화를 곤봉으로 때려죽였다(<동아일보> 1924.8.5.; 193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