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 마사하루 목사오카마사하루자료관 설립의 바탕이 된 고 오카 마사하루 목사
이윤옥
조선인의 인권을 위해 분투한 일본인들
지금이야 '일본이 전쟁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만, 패전 뒤 상당 기간 '일본의 책임론'은 금기였다. 그런 가운데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주머니를 털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나가사키에 숨겨진 조선인 피폭 문제에 매달렸고 실태조사를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그는 항상 차별받고 있는 약자 편에서 서서 일본정부와 강제노역자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린 악덕 기업을 향해 반성과 보상을 촉구해왔으며 만년에는 '일본의 가해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현재도 남아있는 차별 철폐와 정부의 보상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자료관 건립'을 구상했으나 자료관 건립을 보지 못하고 1994년 7월 21일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토지문제와 건물 신축비 자금부족으로 애를 먹었으나 1995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중심이 되어 그의 뜻을 받드는 수많은 시민의 도움으로 토지 매입과 건축비를 마련 1995년 10월 1일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문을 열었다. 설립기금 4500만 엔은 25년 동안 월 18만 엔씩 갚는 조건의 대출금과 기부금 등으로 마련했으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정부나 행정기관의 재정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자료관은 회원들의 회비와 찬조금, 입장료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꾸려가고 있다. 8월 그리고 9일이 되면 나는 나가사키의 두 자료관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가해국 일본에서 버려진 조선인의 삶과 인권을 위해 뛰었던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한국사랑 정신'도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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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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