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의사 기념관박열의사 기념관 표지
장순심
문경에 가면 아나키스트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열 의사 기념관'이 있다. 영화 <박열>에서 배우 이제훈이 그 역할을 연기할 때까지 나는 박열이라는 사람에 대해 몰랐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난 후, 영화가 역사적 인물을 담고 있지만 배역은 실제 인물의 삶을 부분적으로밖에 재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훈이 그의 선 굵은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지만, 기념관에서 본 실제 박열 의사의 얼굴선과 눈빛은 더 짙고 강하게 느껴졌다.
박열 의사는 문경에서 태어나 자랐고, 18세인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의 추적을 피해 그해 10월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1925년에 천황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20여 년을 감옥에 있는 동안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45년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박열 의사 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이후 귀국하여 1948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납치되어 북으로 강제 이송되고 73세에 북한에서 서거했다. 북한에서 20년 넘게 살았으며 북에서의 그의 행적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서거 당시 그는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에게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박열 의사 기념관에는 박열 의사의 행적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1922년 의열단과 연계하여 폭탄을 반입하고 히로히토를 폭살하고자 했던 것과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의 이야기도 전시장의 상당 부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념공원 내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그를 위한 추도식도 매년 열리고 있다고 했다. 그를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고마웠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니 약산 김원봉이 떠올랐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1918년에 난징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며 망명 생활을 시작했고, 3.1 운동 이후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천명하고 의열단을 창단, 단장에 오르며 일제 요인을 암살하는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시작했다.
1926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다가 1932년 대일 혁명세력을 결집하여 연합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했다.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대한민국의 무장독립투쟁사에서 단연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