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문서 고경제24867호독립군의 무기 반입 경로가 지도로 표시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일제 정보문서('구경 제24867호')는 노령에서의 육로 반입에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첫째 오소리(烏蘇里) 연선 방면에서 국경 포구라니-치나야 부근으로 나와 국경을 넘어 둔전영(屯田營) 또는 삼차구(三 口)를 경유하여 수분하원(綏芬河源)으로 거슬러 올라가 왕청현 오지 나자구로 반입한 것,
둘째 추풍 방면에서 동녕현의 국경 호포도하(胡布圖河) 연선이나 삼차구에서 국경을 넘어 대오사구에서 수류를 따라 노흑산을 지나 나자구를 경유하여 훈춘현 대황구(大荒溝)나 왕청현 서대파(西大坡)로 반입한 것,
셋째 훈춘 국경 방면에서 주로 홍기하(紅旗河)의 상류 삼림 지대나 바라바시 쪽에서 교묘하게 국경 감시를 피하여 훈춘 오지로 반입한 것.
일제 문서는 둘째 경로로 많은 무기가 반입된다고 적었다. 북로군정서가 이용한 경로다. 중국 관헌을 만나면 무기를 빼앗길 수도 있어서 우회로를 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래 걸렸다. 북로군정서 3개 운반대가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40일 안팎이나 걸렸다. 거리가 더 먼 남만주의 독립군단은 노령에서의 무기 구매가 훨씬 어려웠다.
남만주는 무기 구매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제는 1920년 5~8월에 '중·일 합동수색대'를 동원해서 흥경, 유하, 해룡, 통화, 환인, 관전 등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학살했다. 뒤에 있을 '경신 대학살의 전주곡'이었다.(주2) 노령에서 무기 구매 길이 열려 활발히 무기 반입이 이루어지는 때에 남만주 독립군단은 왜적에 대처해야 했다. 근거지를 지키면서 노령에서 무기를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노령에서 구입하지는 못했지만 남만주의 독립군단도 무장을 위해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무장을 강화했다. 1919년 4월의 일제 문서('소밀제672호')에 따르면 쾌당모자(快當帽子)의 부민단은 총기 구매를 위해 분주해서 "대략 예정한 수를 얻었다"고 한다. 1919년 4월에 무장을 갖춘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무기 구매를 위해 노력하던 정황은 정확하다.
1920년 10월의 일제 문서('기밀공제25호')는 한족회와 독립단 무기 현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족회 : 노국제 보병총 90정, 동 자동식 60정, 미국제 보병총 16정, 동 윈체스터 군용총 21정, 중국제 엽총 160정, 동 탄발식 권총 111정, 영국제 보병총 14정, 동 자동식 권총 40정.
독립단 : 노국제 보병총 170정, 동 자동식 권총 230정, 영국제 보병총 16정, 동 휴대 기관총 12정, 동 윈체스터 군용총 32정, 미국제 권총 22정, 중국제 권총 49정.
총 종류로 보면, 한족회는 소총 201정, 엽총 160정, 권총 151정이고 독립단은 소총 218정, 권총 301정, 휴대 기관총 12정이다. 남만주는 밀정에 대한 보안 대처가 강해서 일제 정보문서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독립운동 근거지를 파괴하려는 일제가 침략 이유를 만들기 위해 무장을 부풀린 점도 있을 것이다.
영사관 일경이 집안, 관전을 수색할 때 한족회, 독립단원 97명을 체포하면서 미국제 휴대 기관총 1정, 동 위체스터 군용총 1정, 노국제 보병총 1정, 영국제 자동권총 1정, 중국제 엽총 1정, 동 권총 1정 등 총 6정을 압수했다 한다('기밀공제25호'). 기초 무장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위 통계처럼 1000정 이상을 보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 무장이면 일경 수색대가 습격할 때 한족회와 독립단이 항전력 보존을 위해 피신하지는 않았겠다.
독립단의 무장, 실제 시점은...
실제 독립단이 부대원을 무장시킬 정도로 많은 무기를 반입한 것은 10월 초다. 4월 초 김승학이 상해로 파견됐다. 그는 군기국장(軍機局長)으로서 무기 구매를 '독립군 성쇠'가 달린 것으로 중시했다. 240정과 수만 발 탄환을 이륭양행 배에 숨겨 관전현에 도착한 것이 9월 하순이었다. 그리고 10월 초 독립단 무장대오인 광복군사령부에 도착했다(김승학, <망명객행적록>). 남만주 독립군의 첫 대규모 무장이었다.
한족회, 곧 서로군정서는 대규모로 무기를 산 기록이 없다. 앞서 본대로 일제 정보문서에 500정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독립단의 실제 총기 구매 사례와 비추어 보아도 사실이 아니다. 1919년에 세 곳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총기훈련을 할 정도의 기초 무장은 되어 있었지만, 부대원과 생도가 모두 무장할 정도로 많은 무기는 없었다. 일찍부터 교관을 무기구입 위원으로 길림과 노령에 파견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우선 노령에서 멀어서 반입이 어려웠다. 하지만 독립단이 먼 상해에서 구입해 온 점을 고려하면 지리적 요인은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둘째, 재정을 세 곳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집중했기 때문에 대규모 무기 구매가 어려웠다. 무기 구매의 난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 북로군정서와의 협정에 보인다. 곧 1920년 5월 29일 '사관 양성, 무기 구매에 대하여 상호 부조'하도록 협정을 맺었다.
사관 양성은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이 북로군정서에 5월 29일 이전 파견돼 실행되고 있었다. 무기 구매는 노령에서 무기 구매 길이 열리던 무렵이므로 노령에서 가깝고 재정이 상대적으로 여유 있던 북로군정서가 대량 사서 서로군정서에 보낼 계획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일본군의 만주 침략으로 북로군정서가 근거지를 이동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독립군이 지닌 3800여 정의 무기, 독립전쟁 선포
1920년 들어 독립군단 무장이 급속히 강화됐다. 1919년엔 무장을 거의 갖추지 못했는데, 1920년 5월에는 2000명을 무장시킬 정도였다. 일제 문서('조특보 제27호')는, 5월 현재 독립군단의 무장은 노령에서 반입한 소총 약 2000정, 기관총 약간, 화포 2~3문으로 '무기도 점차 정비'되어가고 있었다고 전한다. 일제는 이를 경계했다.
각 독립군단에서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한 정보를 캐내 일제가 5월 15일에 정리한 현황('조특보 제32호')도 위와 비슷했다. 곧 간도, 훈춘에서의 무장을 기관총 18정, 소총 1871정, 탄약 271,800발, 권총 255정, 폭탄 265개로 파악했다. 앞의 내용과 비교해서 화포가 없고 기관총 숫자가 명시됐지만, 소총 숫자는 큰 차이가 없다.
소총이 중요한 까닭은 편제된 독립군의 무장을 충족시키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파악한 6월의 독립군은 모두 4241명인데 소총은 전체 인원의 반 정도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7월의 집중적 반입을 통해 무장은 많이 강화되었다. 9월에 일제가 파악한 바로는 군총 약 3300정, 탄약 약 195,300발, 권총 약 730정, 수류탄 약 1550개, 기관총 9정이었다('고경 제24867호'). 소총, 권총 모두 많이 늘었다. 북로군정서 등 북만주 독립군단이 무기 구매에 주력한 결과였다.
앞서 본대로 북만주 각 독립군단의 무장 현황을 합하면 소총 3200여 정, 권총 400여 정 정도였다. 박격포 2문과 기관총 12정, 1000여 개의 수류탄도 있었다. 남만주 독립군단의 무기를 합하면 소총과 권총 포함 3800여 정이었다. 세부명세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9월에 일제가 파악한 무기 현황과 비슷하다.
이후에도 무기를 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일제 정보('고경 제24867호')에 따르면 임시정부 간도파견원 안정근(安定根)이 노령에서 4000정을 계약하고 반입을 위해 북로군정서 운반대를 파견했다거나, 북로군정서가 노령에서 30,000정의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북로군정서 운반대가 귀환한 뒤에 다시 파견되지 않았고, 또 30,000정은 구입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위 기록은 사실이 아니지만, 일본군의 만주 침략을 앞둔 시점에도 무장을 확충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