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에 세워진 윤희순 동상춘천시 온의동에 있는 이 동상은 윤의병장의 의지를 잘 표현했다
조창완
48세이던 1907년에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와 화약을 제조하는 일을 같이한다. 의병장으로 불린 것도 이 활동을 통해서다.
하지만 류인석이 이끄는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에 실패하자, 의병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곳에서도 윤희순 의병장은 본분을 잊지 않았다. 남자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세우고 교장을 맡아 민족 교육에 앞장선다.
1914년과 1915년에 시아버지 류홍석, 재당숙 의암 류인석, 남편 류제원 등도 세상을 떠난다. 이후 푸순현 포가둔으로 이동해 살아간다. 1919년에는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독립단'에 참여하고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에 나선다. 76세이던 1935년에는 큰 아들 류돈상이 푸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비통해 하던 윤희순 의병장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쓴 <일생록>을 남기고 서거한다.
짊어져야만 했던 삶의 무게
그로부터 10년 후에 조국은 해방을 맞지만, 윤 의병장은 한참이 지난 2012년에야 고국 땅으로 돌아온다. 남편의 묘가 있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로 이장해 합장된 것이다.
이번에 만화로 재현된 윤희순 의병장의 이야기는 스스로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곡진한 역사가 그대로 살아있다. 해방 후 귀국해 청계천 넝마주이로 살아야 했던 고흥 류씨들의 설움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경술국치 이전 춘천 남면과 일제 하 간도에서 윤희순 일가의 힘든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결국에는 고문으로 옥사하는 큰아들 류돈상의 인생을 관조하는 윤 의병장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줘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남은 이들에게 죽음보다 어려운 삶을 떠안긴 채 혼자 떠나는 것이 죄스럽다고 말하면서도 쉬고 싶다고 했다던 그. 윤 의병장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차마 가늠하지 못하겠다.
윤희순 의병장은 남녀 간 역할이 분명하던 시기에 그 간극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실천한 사람이다. 그간에 이런 삶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남녀의 역할을 구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