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27.9.15 기사참의부 6인대의 이름을 적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6월 18일 희천군 송관동(宋串洞) 교전에서 1명이 부상당하자 5인이 활동하며 5인대로 불리기도 했는데 부상병 보호를 위해 1인이 남을 때는 4인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부상병이 만주 본대로 귀환하지 않은 것은 중상이 아니며 또한 처음부터 오래 작전하기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배낭은 물론이고, 천막, 도끼, 가마솥, 식량(좁쌀·백미) 등 근거지를 확보하고 오래 작전할 수 있는 군수품도 지니고 있었다(1927.9.4). 그래서 부상 치료 후 다시 작전에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고 완쾌되자 8월 10일부터 함께 작전에 나섰다. 이 때부터 다시 6인대가 되었다.
6인대는 1927년 5월 말에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서 군자금 모집, 일경 사살 등의 작전을 했다. 일경은 5월 26일 위원군 서태면에서 이들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다. 이후 추격대를 편성해서 6인대를 사살·체포하려 했지만, 6인대는 평북·평남의 여러 곳을 오가며 추격을 뿌리쳤다. 5월말부터 7월말까지 58일간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 덕천군 등을 다니며 13곳에서 자취를 드러냈다(1927.7.26). 일경은 평남 경찰부 경무과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250여 명의 수색대를 동원해 추격했지만 신출귀몰한 6인대의 뒤만 쫓았다.
7월까지 몇 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6인대는 피해 없이 경계망을 뚫고 계속 작전했다. 계획대로 장기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며 특히 7월 22일에는 수백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고 24일에는 풍덕면 송정리주재소 순사부장 등 일경 3명과 교전했다(1927.8.7). 부상병 합대 이후에는 8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희천군 서면 평원리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집했다.
1200여 명의 일경 대부대와 맞서 싸우다
일경은 250여 명의 수색대가 6인대를 막지 못하자 급기야 1000여 명의 경찰을 추가 파견했다. 평북 일대에 3중 수색선을 펴고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8월 하순부터 강계경찰서장을 총지휘로 하여 강계 만포 위원 초산 벽동 북진 전천 등 7개 경찰서 인원이 총동원되어 수색과 추격에 나섰다(1927.9.13). 이때부터 6인대의 작전 목표는 군자금 모집과 일경 소부대 공격에서, 적 포위망 뚫기로 바뀌고 9월부터 일경 수색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9월 2일 일경 수색대는 6인대가 주둔하던 초산군 송성동 약수령으로 접근했다. 오후 3시 무렵 바위 뒤에 매복했던 6인대가 일경 수색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녁 8시까지 5시간 동안 교전이 이어졌다. 일경의 탄환이 떨어질 무렵 근처에 있던 다른 수색대가 전투 지역에 도착해서 6인대를 공격해왔다. 6인대는 전투를 마감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출장반 대장 이일권이 전사한다. 전투현장에는 6인대의 천막, 식량, 배낭 등의 군수품이 있었다. 이들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6인대의 퇴각은 신속했다. 추가 수색대가 공격해 오자 더 이상의 교전은 무모하다는 전술적 판단으로 빠른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일권은 부대원 5인의 퇴각을 돕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거나 부상당해 이동하기 힘든 상황에서 부대원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게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겠다.
9월 2일의 이 전투는 6인대의 작전 목표가 군자금 모집에서 일경 공격으로 바뀐 결과였다. 곧 진입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을 목표로 가능하면 장시간의 전투를 피하려 했지만, 이 단계에서는 퇴각보다 일경에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전술 전환이 있었다. 추가 수색대가 공격하기 전까지는 6인대가 공격해 상대할 수 있는 적이라고 판단했다. 곧 적은 규모의 수색대는 선제공격할 정도로 일경 공격이라는 목표가 수립되어 있었다. 이일권의 전사는 작전 목표 전환에 따른 치열한 전투의 결과였다.
출장반 5인은 7일 밤 8시 무렵 위원군 서태면 인덕동에서 일경대와 1시간 동안 교전한 후 퇴각했다(1927.9.9). 제3수색선을 돌파한 이들은 다시 제2수색선 초산 방면으로 들어갔다. 8일 오후 9시 무렵 화신동 화곡 외탕곡에 진입해서 탐문 수색 중인 일경 대를 선제공격했다. 골짜기에서 11시 반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1명이 전사하고 4명은 퇴각에 성공했다. 전사한 독립군이 지녔던 군수품은 모젤 권총, 탄환, 민병모(民兵帽), 수첩, 시계 등이었다(1927.9.10,12,13). 탄환은 77발이었다. 여러 차례 전투를 했는데도 그 정도의 탄환이 있었다. 오래 전투를 치를 정도로 충분히 무장했던 것이다. 이 때 전사한 독립군은 다른 대원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게 길목을 지키고 일경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