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이장>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그런데 한국의 장녀들은 이 같은 심리적 특성을 사회에서 꽃피우기보다는 '가족 안에서' 발휘하며 갇혀 있는 것 같다. SNS에는 장녀로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듯하고, '돌봄을 강요받으며', '가족의 각종 대소사를 처리해야 하는 데 매여' 괴롭다는 하소연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왜 한국의 첫째 딸들은 자신들의 특성을 가족 안에서만 발휘하게 된 걸까?
이는 휴게소에서 만난 할머니가 낯선 이에게조차 거리낌 없이 드러낸, '딸이 없으면 외롭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같은 인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한국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가족은 여전히 강력한 '시가 중심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시가를 중심으로 한 수직적인 관계가 중심이 되는 가족 안에서 아내와 남편은 평등한 의사소통을 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주 양육자'의 임무는 대부분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결국 엄마로서 살기를 강요받는 여성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 대신 딸과 더 내밀하게 자신의 감정을 나눈다. 때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들이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부모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장녀들은 이 꿈과 욕망이 가장 잘 투사되는 대상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딸들은 어머니의 상처를 무의식으로 동일시하게 되고,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가족 안에서 더 많은 중재 역할과 책임을 떠안게 된다. 특히, 장녀들은 특유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발휘에 이런 역할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어머니가 투사한 꿈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쓴다.
또한, 어릴 때부터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해라', '외출한 사이 동생을 잘 챙겨라'라는 말을 들어온 탓에 다른 가족 구성원의 '돌봄'에도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게다가 돌봄은 여성의 것이라는 시각이 강한 한국문화 속에서 돌봄의 역할은 장남보다 장녀에게 더 크게 부과된다.
남동생을 하나 둔 30대 K-장녀 이웃의 말은 이런 현실을 대변한다.
"어릴 때부터 매일 들은 말이 누나니까 동생한테 잘해라, 양보해라 이런 거였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반대로 내가 동생이고 동생이 오빠였으면 안 그랬을 것 같아요. 아마도 장남이니까 더 식구들이 맞춰주지 않았을까."
장녀들이 '나다움'을 회복할 때
결국 K-장녀들의 호소는 한국의 가부장제와 첫째 아이의 심리적 특성이 맞물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 책임감과 성실함이 가부장 문화와 만나 가족의 높은 기대와 돌봄 요구에 부응하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때문에 K-장녀들의 어려움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들은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낄 것을 강요받고,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양보한다. 때로는 나의 꿈이 아닌 가족의 꿈을 위해 애쓴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각종 법적 관습적 지위에서는 남자 형제들에게 밀리는 것이 K-장녀들이 겪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K-장녀들이 빠져나오는 길은 없을까. 근본적으로는 여성에게 돌봄을 전가하는 가부장 문화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식주를 챙기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돌봄을 가족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어머니나 장녀에게 집중되는 돌봄에 대한 책임도 줄어들 것이다.
영유아기나 노년기, 투병기 등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있는 가족 구성원에게 사회가 적절한 돌봄 체계를 제공한다면, '돌봄'을 이유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장녀에게 자신의 감정과 꿈을 투사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장녀들 역시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장녀들은 '첫째 아이'의 특징을 '장점'으로 발휘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제도적, 문화적인 변화가 자리잡는 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제 장녀들이 먼저 나서보면 어떨까? 장녀 특유의 실행력을 발휘해 가족들과 적당히 선을 긋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의 하소연이 듣기 괴롭다면 "이젠 이런 이야기 내게 하지 말아달라"고 선을 그어보고,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식사를 챙기는 대신 이들에게 밥 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자. 장녀들이 일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작은 변화를 시작한다면 견고한 가부장제의 틀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딸이 없어도 외롭지 않을 때', 더 나아가 '자식이 없어도 외롭지 않을 때',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자녀들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때, 모두가 자율적이고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변화의 시작이 K-장녀에게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K-장녀 현상이 '하소연'과 '푸념'을 넘어 변화의 발판을 만들어 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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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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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없는 엄마는 불쌍해"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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