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참모부 문서 관참첩제688호 보통보 제21호고산자 신흥무관학교를 대학교로 적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가장 높은 군사 과정으로 교성대가 있었다. 성적이 뛰어난 졸업생을 뽑아서 '독립군 사관으로 배속'시키기 위한 고급 군사교육 과정이었다.(주3) 곧 실제 '간부 사관'으로 임관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다. 이 과정은 1920년 2월부터 개설되었다. 이병철은 1919년 10월 합니하 지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에 복무하다가 1920년 2월 교성대에 편입되어 4월까지 '특별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서로군정서 '의용대 내무반장, 간부'가 되었다(<동아일보> 1921.11.17). 후술하듯이 일제의 압박으로 졸업생을 교성대로 편제해서 안도현으로 근거지를 이동했는데 일제는 졸업생을 각 방면의 독립군 사관으로 배속시킨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군사 교재 편찬과 소부대 전술, 산악 행군의 실전 훈련
신흥무관학교 생도는 내무생활을 하면서 학과와 술과(術科)를 교육받았다. 3.1혁명 전에는 3년 과정의 본과에서 '국문, 역사, 지리, 수학, 수신, 외국어, 창가, 박물학, 물리학, 화학, 도화, 체조' 등을 가르쳤는데(주4) 3.1혁명 후 속성 사관 과정에서는 중학 과정을 졸업한 학생(고산자), 중학 과정에 있던 학생(합니하)을 교육시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반 학과 교육은 많이 축소되거나 없어졌다.
김산은 합니하 지교에 입학하기 위해 '지리, 수학, 국어, 국사, 신체검사'의 시험을 치렀는데, 이들 과목은 군사 교육을 위한 기초라 할 수 있다. 또 입학 후 '조선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 깊게 연구'했다는데(김산, <아리랑>) 학과 교육이 군사작전과 직접 연관된 분야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3.1혁명 전의 신흥무관학교 군사교육은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등 대한제국 장교 출신들이 담당했다. 교육 내용도 대한제국 무관학교와 비슷했다. 비교하면 이렇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주5)
학과 : 전술학, 군제학(軍制學),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외국어학
술과 : 각개 교련, 중대 교련 및 야외 연습, 자기 전공과 이외의 병기 용법 연습
기술 : 체조, 검술, 마술(馬術)
신흥학교(주6)
학과 : 보(步)·기(騎)·포(砲)·공(工)·치(輜)의 각 조전(操典), 내무령(內務令), 측도학(測圖學), 훈련교범(訓練敎範), 위수복무령(衛戍服務令), 육군징벌령(陸軍懲罰令), 육군형법(陸軍刑法), 구급의료(救急醫療), 총검술(銃劍術), 유술(柔術), 격검(擊劍), 전략(戰略)·전술(戰術), 축성학(築城學), 편제학(編制學)
술과 : 각개 교련과 기초 훈련, 야외 연습
체육 : 강행군, 운동, 축구, 목판, 철봉
신흥무관학교에서 가르치던 내무령, 위수복무령, 육군징벌령, 육군형법, 편제학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군제학에 포함되는 것이며, 신흥무관학교의 총검술, 유술, 격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술과에 포함된다. 분류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교육 내용은 비슷하다. 다만 병기학, 병기 용법 연습이 신흥학교에 없는 것은 3.1혁명 전에 무기 구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 무기를 중점적으로 다룰 수 없었기 때문에 목총의 총검술 훈련을 중심으로 실시했다.
3.1혁명 후에는 '최신식의 군사 기술을 소유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 김경천이 '최신 병서와 군용 지도'를 가지고 망명하여 신흥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중국 운남무관학교[雲南講武堂]을 졸업한 이범석, 배천택도 신흥학교 교관이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중국 무관학교 출신이 교관이 된 후 신흥무관학교는 "최신식의 군사 기술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당시 교관이던 김승빈은 회고(<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중심의 교육과정에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성해진 일본 육군의 군사교육 과정과 중국의 군사교육 과정이 추가되어 신흥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3.1혁명 전의 교육 과정은 일제 정보문서나 중국의 공문서, 원병상의 회고 등으로 자세히 전해지지만 3.1혁명 후의 교육 과정 전체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군사교재의 편찬이다. 1920년 6월 일제경찰은 삼원포 소재 최승무(崔承武)의 집을 급습하고 많은 서류와 교재를 탈취했다. 그곳은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의 교재, 서류를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기관으로 판단된다. 일경은, '초급 야외근무부' '척후 보초 근무부' 등의 부대 서류, '신흥학교 경리 수지 원장' '신흥학교 경리 일기장' 등의 신흥무관학교 서류, '임시정부 헌법', '선언서' 등과 함께 다음 같은 군사학 교재를 탈취했다('기밀공제70호').
소부대전술 48본(本), 병학초계 육군대부호(兵學初階 陸軍隊符號), 병학초계 측량학적요(兵學初階 測量學摘要), 병식체조, 지형학.
근무부 등의 서류처럼 군사 교재도 남은 부수가 같지 않은데 이는 교육 현장에 배부하고 남은 여유분이기 때문이다. 또 '초계[초급단계]'라는 이름으로 육군대부호, 측량학 교재가 편찬되었으므로, 위 교재 외에 다른 분야의 교재도 제작되고, 또 교육 대상의 단계에 따라 군사 교재가 편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교재 편찬이 학과와 교육 대상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