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니 멘델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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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는 네 살이 된 파니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부르주아 여성에게 피아노 연주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필수과목 중의 하나였다. 이 무렵 파니에게 남동생이 생겼는데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어느 결혼식장이나 울려 퍼지는 결혼행진곡을 만든 그 멘델스존 말이다. 파니는 날마다 펠릭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펠릭스 아래로 레베카와 파울이 태어나 파니의 형제자매는 총 4남매가 되었다.
1812년 멘델스존 부부는 함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멘델스존 집안은 유대인으로 유대교를 신봉했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에 대한 탄압이 있었기에 혹여라도 자식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을 염려한 멘델스존 부부는 본인들은 유대교로 남지만, 자식들에게는 1816년,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렇게 멘델스존이라는 성은 이제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되었다.
파니와 펠릭스는 부잣집 자제들답게 집안에서 고전문학, 수학, 역사 등 전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울 하이제의 아버지인 언어학자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하이제에게, 그리고 비곳(Marie Bigot), 베르거(Ludwig berger)와 훔멜(Johann Nepomuk Hummel), 그리고 첼터 (Carl Friedrich Zelter)와 같이 당대 최고 음악가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특히 짤터를 통해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접했는데, 이는 파니에게 음악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같이 공부하고 연주하며 이 두 천재 남매의 교감은 점점 특별해졌다. 대문호 괴테와 가까웠던 첼터는 그의 음악 노트에 파니가 펠릭스보다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다고 적었다.
파니는 1817년, 12살의 나이에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열린 연주회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 실린 24개의 곡을 암보로 연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파니와 펠릭스 두 천재 남매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엄격하게 짜인 교육 일정에 따라 움직였으며 이들에게 자유시간이란 것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남매는 희곡에도 관심이 있어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각색하여 '정원에서의 시간'이나 '티타임과 눈'이란 제목으로 연극을 만들어 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은 훗날 펠릭스의 명곡인 관현악곡 '한여름 밤의 꿈'의 탄생의 씨앗이 되었다. 이렇듯 이들에겐 작품을 만드는 것 자체가 놀이었다.
1819년 파니는 아브라함의 생일선물로 그녀가 만든 첫 번째 작품인 가곡 '오 당신의 음색이 경쾌하게 떨린다'를 선보였다. 아브라함은 파니가 교양 있는 여자로 자라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여인이 되길 바랐다. 파니가 어떤 재능을 가졌건 그건 아브라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파니의 15세 생일날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그런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아마 펠릭스에게 있어서 음악은 직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너에게 음악은 하나의 장식품 같은 것일 뿐. 그것이 네 삶의 중심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펠릭스의 야심과 소망을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겠지. 펠릭스가 음악을 천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펠릭스와 반대로 너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 항상 훌륭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펠릭스가 칭송받을 때 너 역시 기쁨을 느끼지 않느냐. (중략)그러니 앞으로도 분별 있게 처신하도록 해라. 그것이 여자다운 것이고,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란다."
아브라함의 차별은 단지 여성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클라라 슈만이 전문 피아니스트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파니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문제는 파니가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클라라가 모차르트처럼 아버지에 의해서 철저히 연주자로 만들어졌던 것에 반해 아브라함은 파니가 '여성의 소명'에 따라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랐던 것이다. 1838년 런던의 '아테나움'지 기사에는 그녀가 가난했더라면 그 재능이 전 세계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베를린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된 멘델스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