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부르며 적대시 정책을 구사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도 막상 시진핑을 만난 직후에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경쟁자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 정도로 부담되는 일이라면, '적'도 아닌 '주적'이란 표현을 쓰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창수 국가안보실 통일정책비서관이 2001년 <황해문화> 제31호에 기고한 '주적 개념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주적이란 정확한 개념 정의도 없고, 학문적으로 검증된 개념도 아니며, 국민적인 공론화 과정을 거친 개념도 아니고,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도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다."
"미국·일본·호주·캐나다·중국과 같이 현재 <국방백서>를 발간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어느 나라도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특정 국가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적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사회 현실이다."
미국은 북한·이란을 불량국가나 악의 축으로 폄하하면서도, 양국을 주적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북한·이란은 불량국가다' '북한·이란은 악의 축이다' 같은 표현은 명명자와 상대방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명명자의 눈에 상대방이 그렇게 비친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주적'이라고 부르는 일의 위험성
하지만 '북한·이란은 주적이다'라는 표현은 명명자와 상대방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노출한다. 명명자가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전달하는 표현이다. 이것이 명명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위험한 일이므로 정상적인 국가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척해도 살아가기 힘든 판국에 '너는 나의 주적'이라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은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한민국을 북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남한의 <국방백서>에서 주적 표현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는 일이 반복되다가 1999년 및 2000년 백서에 다시 등장한 것을 두고, 2000년 12월 10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주적론을 철회하지 않는 한, 남북 합의사항들이 제대로 진척될 수 없다" "대화와 협력의 상대방을 주적으로 간주하면서 북남 상급(장관급) 회담과 군사실무회담을 누구와 하자는 것이며 적십자회담과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은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라고 따져 물었다.
사실, 주적 개념은 1980년대 후반 이전 미·소 냉전 시대에나 어울릴 만한 것이다. 냉전 시절에는 제3세계 비동맹 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 미국 진영 대 소련 진영으로 양분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이 구도에서는 상대방 진영 전체가 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적들 중 하나를 주적으로 설정할 만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들은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만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탈냉전이 정착된 1990년대부터는 그런 진영 대결이 사라졌다. 그래서 상대방 전체를 적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어졌고, 그중 하나를 주적으로 상정할 이유도 없게 됐다. 또 탈냉전 하에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도 불명확해졌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가급적 친구인 척, 좋아하는 척하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또 국가간 대결이 군사 분야 이외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자국과 특정 국가의 관계를 일의적으로 규정하기도 힘들게 됐다. '적이다, 아니다'를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일례로, 지금 한국과 일본은 한·미·일 삼각 동맹에 편입돼 있다는 점에서는 우방이지만, 독도·식민지배·무역분쟁 등에서는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적으로 규정하기도 모호하고 동맹으로 규정하기도 모호한 관계들이 1990년대 이후 많이 생겨났다. '주적' 표현은 고사하고 '적' 표현도 쉽게 사용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주적' 개념, 이순신·신립 등 역사적 전투 사례로 살펴보니
더군다나, 주적 개념을 사용하면 군사·안보상 유연성도 발휘하기 어렵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과 임란 초기에 조선이 고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교란하는 2대 행위자는 대마도(당시까지 독립정권)·일본의 왜구와 만주의 여진족이었다. 동아시아 최강인 명나라는 이중에서 여진족을 더 위험시했다. 여진족이 명나라 수도 북경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과 공동으로 여진족에 대한 압박 정책을 전개했다.
이런 상황은 조선을 곤란케 만들었다. 명나라에 이끌려 여진족을 일종의 주적으로 상정하다 보니 여진족을 조선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여진족과의 긴장 관계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군이 유목민 기병대와의 전투에만 최적화되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선박을 타고 다니다가 육지에 상륙해 보병으로 전환되는 왜구에 대해서는 방비를 소홀히 하게 된 것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한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의 국방태세가 여진족과의 대결에 최적화돼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이 그 틈을 노렸던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만 해도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 장군과 그를 믿고 따르던 8천 병력이 충주 탄금대에서 의외의 일격을 당하고 장렬히 전사해 전쟁 초반의 전세가 크게 기울어진 것 역시 동일한 이유에 기인했다. 신립 장군의 전법이 여진족 기병대한테나 통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