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봉 참전용사
김병기
[70년 전] 'K 군번' 1기생의 거듭된 상륙작전
구순(九旬)을 앞둔 류씨는 1950년 8월에 대구에서 입대했다. 류씨가 일본 후지산 밑에 있는 UN군 미 육군 제7사단 훈련캠프에서 받은 군번은 K-110-1755. 유엔군에 편입된 카투사 1기였다. 그는 의무중대에 배속됐고, 캠프에서 3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친 뒤 부산항으로 돌아와서 상륙작전 예행연습을 한 뒤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K군번을 받고 처음으로 수행한 작전이었다.
류씨는 다시 부산에 내려갔고, 11월 1일 군함을 타고 함경남도 이원에 상륙했다. 북청을 지나 후치령을 넘어 풍산으로 올라갔다. 조선시대에 귀양을 보냈던 산수 갑산을 지나 11월 20일 압록강 해산진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군은 "이제 통일이 된다", 미군들은 "이제 집에 돌아간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즈음 중공군 참전 소식을 들었고, 미 해병 1사단과 류씨가 소속된 미 7사단이 포위를 당했다. 해산진 시민들의 도움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용됐던 20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밤새워서 미 7사단이 도착한 곳이 장진호였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그곳에서는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를 당해서 고전을 하고 있었다.
27일 동안 쏟아진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흥남부두에서 탈출에 성공한 그는 "나는 행운아였다"고 말했다. 그 뒤에도 그는 중동부 전선과 태백산 탈환 작전에 참여했고, 횡성과 춘천, 화천 전투에 참가하면서 국군 부상자뿐만 아니라 중공군 부상자도 치료했다.
그는 격렬했던 백마고지 전투와 폭찹(Pork Chop Hill) 고지 전투에도 참여했다. 밤에는 중공군이 피리와 나팔을 불며 인해전술로 공격해서 점령을 당했고, 낮에는 미군이 점령을 하는 등 6번 넘게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격렬한 전투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폭찹 고지에서 휴전을 맞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을 때 저는 연천 백마고지 옆의 폭찹고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지와 고지를 사이에 두고 300여m를 마주보고 중공군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중공군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죠."
[70년 그 후] 70분간의 만남 "고맙고, 미안했다"
류씨는 휴전이 된 뒤에 한국군에 편입되는 카투사 통역장교 임관 시험에서 합격했지만, 1954년 7월 4일자로 명예제대를 택했다. 그는 1958년에 미8군 대구병원에 취업을 해서 2004년까지, 정년을 연장하면서 45년 동안 간호사로 활동했다. 그동안 결혼해서 2남 2녀를 뒀다.
퇴직한 뒤에도 무려 6000시간 동안 병원에서 봉사를 해오고 있다. 90살을 눈앞에 둔 K군번 1기생이 지금도 쉬지 않고 봉사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의 표현이자, 의무라고 여기는 듯했다.
"당시 전우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죠. 다시는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류씨가 장진호 참전 전우를 대신해 대통령께 복귀신고를 했던 '70분간의 만남'. 그는 70년 전의 전우를 만나도록 노력한 정부와 살아 돌아오지 못한 7구의 장진호 참전 용사들을 향해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런 그에게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전쟁의 교훈은 무엇인지'를 마지막 질문으로 던졌다.
"평화라고 할 수 있지요.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70분의 의미] 영웅에 대한 경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