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6월, 故 전경무 영결식에서 조사(弔詞)를 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1947년 6월, 故 전경무 영결식에서 조사(弔詞)를 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몽양 여운형은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회장을 겸해 올림픽 무대 참가에 힘썼다. 1947년 6월 20일 스웨덴 스톡홀름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IOC 인준을 받으며 올림픽 참가 길이 열린다. 정부수립 전이었지만 국제법상으로 정부수립이 보장돼 있는 상태였다. 미군정 역시 대한민국 IOC 인준을 지원하고 나섰다. 공식정부 수립 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IOC 인준을 받은 건 한국이 최초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이대택 국민대 스포츠건강재활학과 교수는 "해방 후 조선(대한)체육회장을 처음 역임한 인물이 왜 몽양 여운형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제강점 당시 조선체육회장을 역임한 인물들 중 다수가 친일 행적을 가지고 있다"며 "(몽양은) 해방 후 국가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체육이 가지는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희생도 치러야 했다. 미국을 오가며 올림픽 참가에 힘썼던 전경무 올림픽대책위 부위원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일본 후지산 인근에서 목숨을 잃는다. 스톡홀름 IOC 총회에 참가하는 길이었다. 미국에서 IOC 인준을 돕던 사업가 이원순이 대신 총회에 참가해 일을 마무리 짓는다.
이원순 자전 <세기를 넘어서>(1989)는 "미군정 하지 중장으로부터 올림픽 대책위원회 대표로 IOC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전씨(전경무) 사망소식을 들은 지 3일이 지난 때였다. 여운형씨도 곧이어 별도 전문을 보내왔다. 모두 올림픽 위원회가 IOC에 가입되도록 최선을 다해달라는 부탁이었다"고 긴박했던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인명 희생까지 겪으며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IOC 인준은 신생국 대한민국을 국제무대에 알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IOC 인준 후 대한민국 올림픽 참가를 기념하는 종합경기대회가 1947년 7월 19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렸다. 기념 대회 참가차 길을 나섰던 몽양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19세 청년 한지근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장을 맡으며 한국 올림픽 출전에 힘썼던 몽양의 마지막 길이었다. 한국은 올림픽 참가를 댓가로 또 다른 희생을 치러야 했다.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한상구 사무처장은 "몽양 여운형은 (올림픽 출전을 포함해) 체육계 전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이고 정치, 사회적으로도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었다"며 "업적에 비해 그 가치가 덜 알려진 편인데 이와 관련한 지속적인 관심과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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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전인데, 어떻게 올림픽에 참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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